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Cleopatra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51~기원전 30년이다.
그녀는 깊은 교양과 뛰어난 용모로 태양신의 딸처럼 행동하였다.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하다가
궁정 안의 권력 다툼으로 한때 쫓겨났다.
옥타비아누스와의 싸움(악티움 해전)에서 크게 패하였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점차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어요.
따라서 궁정도 두 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게 되었지요.
이 때 마침 로마의 실권자인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원정을 왔어요.
클레오파트라는 매우 기뻐했어요.
'옳지, 좋은 기회다! 그의 힘을 빌어야지....'
마침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도움으로 왕권을 잡았어요.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케사리온도 낳았어요.
그 후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실력자인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하여 그와 결혼을 하였어요.
그는 당시 로마의 보호 아래 있던 이집트를 완전히 독립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중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이 벌어졌어요.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악티움 해전에서 운명을 건 싸움을 했어요.
그러나 싸움 도중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나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어요.
싸움에 패한 뒤 안토니우스가 자살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까지도 유혹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어요.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가
모욕을 당할까 두려워 스스로 독사에 팔을 물려 목숨을 끊었어요.
클레오파트라는 강국 로마로부터 자기 왕국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로마의 힘을 빌어 대제국을 세워 보려는 야심을 가진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었지만 결국 이와 같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말았지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쓴 말이에요.
하지만 원문을 충실히 번역하면 이래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짧았더라면 세계의 얼굴이 변했을 것이야.'
이 말을 깊이 해석하다 보니 '세계의 역사' 운운하게 된 것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미모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실제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웠으나
절세의 미인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미모만으로 여러 영웅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죠.
풍부한 교양과 재치 있고 세련된 말솜씨가 진정한 그녀의 매력이었어요.
특히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감미로웠는데,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크는 그녀의 목소리를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 음색' 같다고 표현했어요.
또한 그녀는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몇 개 국어를 마음대로 구사했다고 해요.
로마의 대표적인 장군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들로부터 '나일의 마녀'라는 악담도 들었으나
최후의 깨끗한 죽음은 높이 평가되고 있어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이는 역사란,
역사 속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 개인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즐겨하는 가정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안토니우스가 그 미모에 현혹되어 아내를 버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처남인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여 자살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서 클레오파트라의 코 때문에
전 지중해 세계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완전 통합되고
로마의 공화파가 몰락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몇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세기의 미인이라 불리는 클레오파트라.
당대 이집트의 여왕으로 대단한 외모로
로마의 장군 안토니오와 시저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여인이다.
지금도 ‘미(美)’의 상징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자존심과 야망도 높아 당대 최고의 여장부로 알려져 있다.
파스칼이 쓴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라는
글은 단순히 코의 모양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코는 얼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자존심을 대변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취향이 고상하고 도도한 사람에게 ‘콧대가 높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의 여신 이시스여 간절한 기도 들리시나요 왕권위를 맴도는 탐욕의 무리 속을 헤쳐나갈수 있도록 나일강은 나를 위로하는데 슬픔속에 나를 어루만지네 나의 신 이시스여 내가 뭘 원하는지 당신만은 잘 알고있죠 난 왕이될꺼야 신의 축복속에서 내 조국의 영광 위에 신이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 일어서고 말거야. 모든 억압속에서 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수 있는 황금 독수리 처럼..강한 왕이 될거야. 어둠속에 묻힌 이집트여 한줄기 빛을 찾아해매네..나의 신 이시스여 당신은 알고있죠 그 빛은 바로 저라는 걸 난 왕이될거야. 신의 축복속에서 내 조국의 영광 위해 신이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 일어서고 말거야. 모든 억압속에서 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수 있는 황금독수리 처럼 강한 왕이 될거야. 뮤지컬 클레오파트라 中 - 난 왕이 될거야 MICHELANGELO Buonarroti " Cleopatra " 역사는 어느 의미에선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이긴 자들이 살아남아 패배한 자들의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뒤틀어버리곤 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존속해오는 동안 이런 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지거나 왜곡된 진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여기 한 여인이 있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조국이 숭상하던 태양처럼 너무나도 강렬한 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Gustav Morro " Cleopatra " 기원전 50년경 이집트 왕좌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Cleopatra Egyptian Papyrus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흥미를 자극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Frederick Arthur Bridgman " Cleopatra on the Terraces of Philae "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Statue of Julius Caesar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만남을 가졌다. Jean-Leon Gerome " Cleopatra before Caesar "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로라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半裸)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Justus van Egmont " Caesar & Cleopatra "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Vincenzo Camuccini " The Death of Caesar"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드라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Bust of Mark Antony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찍었다.
Alma-Tadema " Antony and Cleopatra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를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망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LAIRESSE, Gérard de " Cleopatra's Banquet "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George Owen Wynne " Apperley Dancer of Ancient Egypt " Hans Makart " The Nile Hunt of Cleopatra "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세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Waterhouse, John " Cleopatra "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Jan de Bray " The Banquet of Antony and Cleopatra "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TIEPOLO, Giovanni Battista " The Banquet of Cleopatra "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라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 왕 중의 여왕'이라 선포하였고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출자’라고 선언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JORDAENS, Jacob " Cleopatra's Feast "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또한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Lorenzo A. Castro " Actium Battle " 특히 카이사르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전투는 안토니우스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기병들이 모조리 적진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이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부하의 배신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안토니우스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다. 이제 다시 되돌 릴 수 없을까?화려했던 그 날들, 그 순간 빛을 잃은 내 운명에 별 빛은 어둠속에 삼키어 사라지네 나를 향한 영광, 모든 꿈도 사랑도 멀어져가네 슬픔에 젖어 헤매이는 내 영혼 별이 되어 사라지네 나에 사랑 운명같은 그대여 그대 품에 안기어 영원히 나를 향한 영광, 모든 꿈도 사랑도 멀어져가네 슬픔에 젖어 헤매이는 내 영혼 찢어질 듯 파고드는 좌절에 고통 소리없이 날 부르는 신의 목소리 사랑! 그대 품에 안기어 숨쉬고 싶어 나의 사랑 !그댈 따라 떠나게 신이시여 살펴 주소서! 뮤지컬 클레오파트라 中 "별이 되어 사라지네" 안토니우스는 칼로 제 가슴을 찔렀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여왕은 아직 살아 있다고 전했다. 거짓으로 죽었다고 알린 것을 후회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 것이다. 많은 출혈로 기진해 있던 안토니우스는 아직 남아 있는 부하들에게 자기를 여왕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P. G. Batoni " The Death of Antony "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마저 핼쑥해진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았다. 안토니우스는 그가 늘 원했듯이 클레오파트라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영묘(고대선조들의 무덤)의 보물은 약탈당했고 그녀의 장남 17세된 카이사리온은 살해되었다. 쌍둥이 남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는 로마로 보내져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막내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형과 누나와 같이 로마로 보내졌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 술을 부어주고 싶다면서, 영묘에 가게 해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부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선선히 허락했고 호위대는 그녀와 시녀 두사람을 영묘까지 호송한 다음 밖에서 기다렸다. Jean Andre Rixens " The Death of Cleopatra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다 Alexandre Cabanel " Cleopatra testing Poison on Condemned prisoners " 클레오파트라를 둘러싼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아름답고 기지에 넘치던 여인이 어떻게 죽었을까 하는 것이고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서 자살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는 것은 클레오파트라로서는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따라서 언제나 새로운 감각으로 미를 추구하던 여왕은 잠든 후에도 영원히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통 없이 죽는 비법을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직접 생체 실험까지 했다. 즉 죄인을 나일강변에 보아 놓고 처형을 했는데, 자기 주치의를 시켜 죄인에게 독약을 투여하게 하고는 어떤 독약으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가를 직접 관찰하였다. 위의 그림은 1887년에 그려진 알렉상드로 카바넬의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실험하는 클레오파트라'는 제목 그대로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투여하여 실험하는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DELACROIX, Eugène " Cleopatra and the Peasant " 플루타코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한 농부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나타났다. 문지기들이 그게 뭐냐고 묻자, 농부는 광주리를 열어 꽉 차 있는 무화과를 보이며 하나를 먹어보라며 권했다. 문지기는 웃으며 통과시켰다.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들라크루아는 위의 그림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클레오파트라의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Hans Makart " Death of Cleopatra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화가들에게 강한 영감을 불러일으켜 많은 화가들이 그녀의 죽음을 다루는 작품을 남겼다. RENI, Guido " The Death of Cleopatra " RENI, Guido " The Death of Cleopatra " RENI, Guido " The Death of Cleopatra " 특히 귀도레니의 경우 크레오파트라의 죽음에 강하게 매료되어 그녀의 죽음을 소재로 연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화가들이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그릴 때는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Regnault " Cleopatra " Vasari " Cleopatra " Guido Cagnacci " The Death of Cleopatra " FICHERELLI, Felice " The Death of Cleopatra " STANZIONE, Massimo " Death of Cleopatra " Guido Cagnacci " The Death of Cleopatra " 화가들의 그림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기괴한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死)과 性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Georges Jules Victor Clairin " Cleopatra "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Leon Samoilovitch Bakst " Cleopatra "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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