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CNN 선정한 / 국내관광지 100선 - 1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원
동경 128˚ 03' 북위 36˚ 45'
면적 : 5.494km²
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찿아 가는 길
주흘관(主屹關) - 영남 제1관(嶺南第1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조곡관(鳥谷關) - 영남 제2관(嶺南第2關)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조곡관(鳥嶺關) - 영남 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축성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선조 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 27년(1594) 2월에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漢江數百里)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조령의 영상(嶺上)에는 잡로(雜路)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영(嶺)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내려가면 깍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야 한다.
이와 같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된다.
또 응암(鷹巖)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감히 발붙이기가 어렵고 궁노(弓弩)와 능철화포 등을 쏘면 백여명이 지킬 수 있다.
문경 동쪽에는 구로(舊路)가 있어 조령의 서쪽에 이르게 되나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문경 서편에도 소로가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 수십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회촌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僧軍) 산척(山尺) 백여인을 얻어 둔전경종(屯田耕種)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화약총포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精軍)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農資)를 주어 파견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으니 선조 27년 10월의 일이다.
용장에게 수백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大兵)이 쳐들어 온데도 전일 같이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성을 쌓고 난 후 죽령에도 축성케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것 같다는 상계(上啓)가 있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징천인(徵賤人)이 축성의 거역(巨役)을 마쳤다고 포상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하여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하여 용장의 배치 건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仁祖)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關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營裨) 손명대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雜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辛忠元)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鳥東門)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
제1, 2, 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설진(設鎭)
주흘관에 있는 조령편람(鳥嶺便覽) 정묘(丁卯) 1927년 9월에 정규원 문경군수가 지은 현판에 의하면
선조 5년에 설진하여 570여명을 배치하였다고 하나
선조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설진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령편람을 개첨한 것이 일제강점기이고 원귀 3년(元龜三年)이라는 일본의 연호가 있다.
이는 선조 5년부터 설진한 천험의 요새가 임란에 쉽사리 방어치 못했음을 강조하여
조선의 무방비와 일본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기록으로 생각된다.
문경현지에 의하면 영조 28년(1752)에 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성(修城)
축성 후 3년이 지난 1712년(숙종38) 5월에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며
수마석(水磨石)과 잡석(雜石)으로 쌓아 성의 과반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영남어사(嶺南御使) 여광주에 의하여 수보(修補) 논의가 제기되고
국가존망이 달린 막중한 곳이라 경성(京城)의 수보규칙(修補之規)에 따르자고 진언되나 시행하지 못했다.
주흘관의 향우측(向右側) 성벽의 각기(刻記)에 의하면 별장 이인성이 1721년에 개축했다.
수구
그 아래의 각기에는 도석수(都石手)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이 있으니
앞의 성벽 각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축 시 또는 축성할 때 기여한 도석수로 짐작이 된다.
주흘관 중수기에 의하면 1752년(영조28), 1772년(영조48), 1840년(헌종6)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주흘관의 향우측 성황사(城隍祠) 부근의 각기는 무진년(戊辰, 1748 영조24·1808 순조8) 3월에
별장(別將) 오해림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흘관 향좌측 성벽 각기에서는 1880년(고종17) 별장 심영식 등의 개축사항을 알 수 있으며,
주흘관 향우측 성벽 각기로 1886년(고종23)에도 별장 김순기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벽에 새긴 몇 자의 글이라 개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아쉽다.
박성호는 1880년에는 감역(監役)으로 1886년에는 감관(監官)으로 수성(修城)에 참여하였다.
그후 1923년~1926년 사이에도 제1관문이 수선되었으며 경진년(庚辰, 1940)에도 제1관문을 중수한 바 있으나
조동문 및 조령관의 수성기록은 찾을 수 없다.
조령편람에 의하면 2, 3관문은 1907년 의병(義兵)의 토벌대(討伐隊)에 의하여 훼손되었고,
제1관문인 주흘관만이 여러 차례의 보수로 옛 모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문경새재와 산신령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馳啓)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강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上啓) 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한 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차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 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하여 태종대왕께 호피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上奏)하였다.
그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진공(錢珍公 : 聞慶錢氏 2世祖)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제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上疏)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줄 수 없겠는가?'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快諾)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께서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赦)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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