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 양동마을
CNN 선정한 / 국내관광지 100선 - 62
역사와 유래
양동마을이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0여기나 있었으나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C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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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주요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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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첨당(無?堂) 보물 제411호 | |||||||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로써,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堂) 해 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 |||||||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이다.
별당건물이기는 하지만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큰 사랑채 격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별당이 외부인의 눈에 잘띄지 않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반해 무첨당은 대문 옆에 자리잡고 있어 큰 사랑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요즈음도 제사를 지내거나 문중의 큰 일이 있을때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사당의 위치는 가옥의 오른편 뒤 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의 사당은 왼편 뒤쪽에 세워져 있는점도 특이한 점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 자형으로 중앙에 6칸짜리 대청을 두고 양옆에 2칸방을 하나씩 두었으며 왼편 앞쪽에 2칸짜리 누마루를 설치하여 건물을 돋보이게 하였다.
높직하게 달아낸 누마루는 바깥쪽으로는 널문을 달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반면 안쪽 마당으로는 난칸을 달고 개방적으로 만들어 내부를 향해 열린 공간을 만들었다 . 오른편 방의 바깥쪽에는 툇마루방을 덧붙여 달고 부섭지붕을 붙였는데 영남지방의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무첨당은 막돌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삼량(三樑)구조로 되어 있고 대청 전면(前面)에는 아무런 창호(窓戶)가 없으나 뒷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벽체를 쳤는데 창방과 장혀 사이의 소로받침을 한 사이사이에는 벽체없이 터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 |||||||
대성헌(對聖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 |||||||
조선 영조 8년(1732년)에 건립되었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공이 살던 집이다.
대성헌(玳聖軒)이라는 당호(堂號)는 앞산 성주봉(聖主峰)을 마주 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쉬며 상념에 잠겨 볼 만하다. | |||||||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월성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189)에 있다.
18세기 중엽에 세운 목조 가옥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집 형태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일자형이며, 3동의 건물이 모여서 전체적으로는 ㅁ자집이다.
무첨당 서북측에 있는 주택으로 조선 영조 8년(1732년)에 건립되었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공이 살던 집이다.
대성헌(玳聖軒)이라는 당호(堂號)는 앞산 성주봉(聖主峰)을 마주 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의 중앙 산등성이의 서북방에 자리잡고 있다. 평면은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 一자형 문간채가 합하여 튼 ㅁ자형이 되었다.
안채는 북측 꺽임부에 부엌을 두고 동측으로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 마루 1칸이 배열되어 정면이 7칸이 되었다. 부엌 서측 아래쪽으로는 광과 축사가 1칸씩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이고,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막돌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막돌바른층쌓기의 낮은 기단에 막돌조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역시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모두 한식기와 집으로 안채는 98년도에 사랑채와 대문채는 99년도에 실시된 양동정비공사 때 보수 정비하였으며, 화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외부는 목조이나 내부는 조적조로 2000년도에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2001년도에 전면쪽에 담장을 세로 설치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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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詠歸亭) 향토문화재 | |||||||
이 정자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젊은 시절 이곳에 모옥(茅屋)을 지어놓고 학문을 수학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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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당 뒷동산 | ||||||||||
경산서당에서 수졸당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동산으로 울창한 소나무로 이루워진 무첨당의 뒤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수졸당 반월정원에서의 편안함의 연속선상에 위치한 듯한 동산으로 진한 소나무 향과 안락함을 느끼며 산책하기에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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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당(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 | ||||||||||
회재 선생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李宜潛) 공이 1616년 초창하였고, 그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부른다.
북촌 중앙 산등성이의 중간지점 동측 언덕받이에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희재 선생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李宜潛) 공이 1616년 초창하였고, 그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부른다.
그후 6대손 이정규공이 증축하였다고 하였다 하며, 정조임금 때 도승지와 대사간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養閒堂) 이정규(李鼎揆)공이 태어나기도 했다.
남향한 사랑채와 대문채가 붙다시피 연접되어 있어 동향인 안채로 보면 동향집 남대문을 이룬 셈이다. 대개 동향집의 경우와는 달리 사랑채와 안방의 위치가 반대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 집의 진입로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 이라 하겠다.
사랑채나 대문채에서 보면 안방은 가장 안쪽에 위치하게 되는 원칙이 무리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사랑방 우측은 바로 대문간이 되고 대문간은 一자형 평면의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실제로 4칸에 그쳤고, 그 동단(東端)에 분리해서 지붕을 조금 낮추어서 2칸의 대문채를 둔 것은 사랑방의 격식과 문간방이 달린 대문채의 격식과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으며 긴 사랑채의 1칸을 그대로 대문이나 중문간으로 하는 경우보다는 적격으로 보인다.
이 대문채와 사랑채와의 관계처리는 이 집만의 독특한 방식이라 할수 있다.
안채와 행랑채 역시 콘크리트 기단으로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 집이다. 지붕은 모두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 ||||||||||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6호 |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공이 지어 살던 집으로 그의 현손(玄孫, 4대손) 홍릉참봉(弘陵參奉) 이희구(李熙久)공의 호를 따라 근암고택(謹庵古宅) 혹은 참봉택이라 부른다. 이 건물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를 완전히 분리시켜 별도의 작은 대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해 놓은 점이다. |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다.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공이 지어 살던 집으로 그의 현손(玄孫, 4대손) 홍릉참봉(弘陵參奉) 이희구(李熙久)공의 호를 따라 근암고택(謹庵古宅) 혹은 참봉택이라 부른다.
이 건물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를 완전히 분리시켜 별도의 작은 대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해 놓은 점이다. 집들을 분산 간개한 별격(別格)의 변화를 보이는 예이다.
안채를 ㄱ 자형 평면으로 끝낸 점과 사랑채를 안채의 담밖에 완전 격리시킨 점은 가장 특색있는 변화라 하겠다. 그 차단 방식은 별당의 차단 방식과 통한다는 점에서 사랑방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엄격한 데서 채택된 방식으로 짐작된다.
그 경우에는 모두 안채와 구조자체가 직접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랑방이 직접 안마당으로 면해 있거나 사랑 부엌을 통해 통로가 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생활관에 따른 사상적 배경이 작용한 결과로도 짐작된다.
ㅁ 자형이나 튼 ㅁ 자형의 폐쇠적 양식이 일반화된 지역에서는 매우 특이한 배치계획인 것이다.
안채는 ㄱ 자형평면을 이루는데 ㄱ 자로 꺾이는 곳에 부엌이 있고 남서향으로 안방과 대청, 건넌방, 작은대청이 일렬로 서 있고 남동향으로 2칸의 광과 1칸의 방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안채 옆에 있는데 대문간채에서 대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우측으로 돌면 곧바로 이르게 된다. 一자형으로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대청으로 되어 있고 방 앞에 좁은 퇴가 있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한식기와를 입힌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헛간도 대문간채와 비슷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한식기와를 입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사랑채, 대문간채 등이 모두 독립적으로 건축된 것이 특색있게 보인다. |
상춘헌(賞春軒) 중요민속자료 제75호 |
안골 초임 우측 동산 근암고택 옆에 자리잡고 있는 이 주택은 상춘고택(賞春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 영조 6년(1730년)경에 동고(東皐) 이덕록(李德祿)공이 건립하였고, 그의 증손으로 예조참의(禮曺參義)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창애 이정덕(李鼎德)공이 동편 사당을 증축하였으며 그의 손자도 문과 급제를 했다.
그 후 후손인 이석찬(李錫纂)공의 호를 따라 상춘헌(賞春軒)이라 부르며 사랑채의 마당 동편에 계획적인 조경으로 동산을 꾸며 놓았다.
평면은 ㄷ 자형 안채 및 사랑채와 一자형 행랑채가 가깝게 붙어있어 마치 ㅁ 자형 주택처럼 보인다. 즉, 이 마을 큰 집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형인 튼 ㅁ 자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능면의 변화가 안방과 부엌의 배치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흔히 부엌으로 배정되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두고 있어 부엌을 안방의 옆에 붙이는 일반형과 달리 안방 밑으로 붙이게 되었다.
부엌을 안방 밑에 붙이는 형식은 중부지방 민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이 집의 경우 안방은 남향방이 되지 못하고 동향방이 되었고 부엌 밑에 방이나 마루 혹은 광을 두지 못하였으며 광은 분리된 아래채에만 두게 되었다. 건넌방을 이원봉 가옥에서처럼 1칸을 대청 쪽으로 당겨놓은 점 건넌방 다음 모서리 반칸을 마루방으로 꾸민 점 등이다.
건넌방에만 달려있어 마루방은 건넌방과 밀접한 기능을 갖게 된다. 평면상으로 보면 안방머리의 반칸 찬방과 이 마루방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기능면에서도 중요한 수장구실을 담당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채는 막돌 허튼 층 쌓기 기단위에 막돌처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에 소로받침은 없고 홑처마로 한식기와를 입힌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앞 기단을 2단으로 하여 화계(花階)를 만들고 꽃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사랑채 북단에는 가묘(家廟)가 있는 데 이 북단의 석축을 3단으로 하여 또 화계를 만들어 화목을 심었다. 사랑 후원에 느티나무 숲이 울창하다. |
사호당(沙湖堂) 중요민속자료 제74호 |
변화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서 바로 연결되는 점이 특징이다. |
안골로 들어가는 중간 위치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진사(進士)를 지낸 사호당(沙湖堂) 이능승(李能升)공이 1840년경에 지어 살던 집이다.
변화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서 바로 연결되는 점이 특징이다. 사호당 한켠에는 아직도 디딜방아가 놓여 있고 5월에는 귀한 화초인 금낭화가 핀다.
행랑채는 일자형인데 구조상 안채와 연접되어 있지는 않고 있으므로 흔히 있는 튼 ㅁ 자형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비교적 드높은 축단(築壇) 위에 세웠으며 상대적으로 부엌 방에 행랑채는 용마루와 지붕고가 낮추어져 있다.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관계는 낙선당의 경우와 같으며 이 집의 부엌도 대략 3칸이나 되는 크기이고 그 끝에 안사랑과 그에 연접한 작은 누마루를 둔 것은 이 마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안바깥채의 여러 기둥 가운데 안 대청의 중심 기둥과 사랑채마루의 중심주 그리고 전퇴(煎退)의 모서리 기둥만은 굵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안채, 사랑채의 중심부를 일단 돋보이게 꾸미고 있다. 중심주를 두리기둥으로 보강하는 것은 영남지방 큰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식이다.
또 건넌방의 위치를 마루방과 바꾸어 놓은 점은 일종의 특색이라 하겠다. 사랑방을 ㅁ 자형의 동변(東邊) 중심부에 두고 안마당 쪽으로 외여닫이를 달아 이방에서 곧바로 안마당을 내려다 볼수 있게 한 점도 흔한 방식이 아니다.
이 집에서 안채사랑채의 마루, 마루방의 변화 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은 매우 특이한 격식을 보여준다. 행랑채는 낮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운 납도리집으로 부연없는 한식기와의 맞배집이다. |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서 오른쪽 단에 광을 두고 바로 그 옆에 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 우측으로는 마루 1칸과 방 2칸이 붙어 있어 행랑채 구실을 하며 그 옆 1칸 이 방에 불때는 함실이며 그 옆 2칸이 광이다.
안채에 해당되는 부분은 2칸의 부엌과 3칸의 안방이 일렬로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여기서 ㄱ 자로 꺾이어 3칸의 정면과 2칸의 측면, 도합 6칸의 넓은 안대청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옆에 2칸의 건넌방이 붙어 있다.
건넌방 앞에는 1칸이 채 못되는 고방이 있고 그 앞에 1칸의 마루와 1칸의 방이 사랑대청과 연결된다. 부엌 북쪽으로는 장독대가 놓이고 사방 1칸의 헛간이 있다. 사랑 마당 앞에는 동북쪽 높은 곳에 三門이 서있고 그 울타리 속에 사당(祠堂) 3칸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낮은 벽돌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소로받침은 없으며 삼량(三樑)구조로 홑처마에 한식기와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몸채는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는 막돌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원주 4개로 처리하였다. 가구는 일반상류주택으로는 예외적으로 삼량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청 전면에는 아무런 창호가 없으나 후면에는 두 짝씩 판장문을 달았는데 문틀 중앙에 설주를 세운 것은 ‘안동 임청각'이나 ‘강릉 해운정',‘회덕 동춘당'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한식기와의 팔작지붕모양 합각을 만들었으나 사랑채와 와서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안방 위에 다락을 만들고 대청쪽으로 작은 창을 단 것이 이채로운 점이다. |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
서백당의 북측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손중돈 선생의 아우되는 손숙돈(孫叔燉)공이 분가한 집으로 지금은 낙선당 손종로(孫宗老)공의 파주손댁이며, 당시 양반 부잣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문채는 3칸이며 가운데가 문간이고 남쪽 1칸은 행랑방이며 북쪽은 외양간이다.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는 넓은 마당이며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대청이 곧바로 건너다 보인다.
마당의 북변(北邊)에 4칸의 광채가 대문채에 접해서 一자로 세워 졌고 광채와 대문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연결짓고 있다. 이 광채는 3칸이 광이고 끝칸은 1칸의 온돌방이다.
ㅁ 字안채에 一字사랑채가 부설되는 일은 보통 있는 예이지만 이처럼 넓은 사랑마당과 그 광채를 여유 있게 안배한 예는 흔치 않은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랑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당에서 나직한 기단 위에 一자로 세워진 5칸 집이며 2칸 대청과 2칸의 온돌방, 2칸 전퇴로 4칸이 구성되고 안쪽 1칸은 1칸반이 뚫린(2칸크기)의 부엌인데 안채의 부엌 아랫방 및 연접된 찬광(마루방)과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에서 안으로 내왕하는 쪽대문과 긴 토방을 이 부엌 앞에서 가로 내었다. 이 때문에 거의 연이어져있어 마치 모든 채가 한 채처럼 보인다.
안채는 ㄷ 자형 평면으로서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안방 2칸과 대청 3칸이 전면에 일렬로 늘어서고 여기에 방이 꺾이면서 붙어 있다.
이 건넌방 옆은 불때는 함실이고 그 옆은 광이 된다. 전체적으로 연속된 채로 보이나 실은 각 채가 각각 독립되어 건축된 주택이다.
대문간채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는 삼량(三樑)집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
창은정사(蒼隱精舍) |
조선 철종 11년에 창은 이남상(蒼隱 李南祥)공이 건립한 주택으로 'ㅁ'자 형태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국정의 개혁을 바라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집으로는 드물게도 정자(내곡정)을 가지고 있다. |
내곡정(內谷亭) 향토문화재 |
이 정자는 조선후기에 지은 건물로써 마을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졸당(守拙堂)의 후손인 내곡 이재교(內谷 李在嶠)공이 학문을 수학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안골(內谷)'이라는 명칭도 바로 공의 호를 따서 붙였다 한다. |
두곡고택(杜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7호 |
거림(居林)에 있는 대표적인 대가옥의 하나이다. 동고(東皐)공의 둘째아들인 이식중(李湜中)공이 1730년경 건립했고, 그 후에 기북에 살던 이조원(李祖源)공의 소유가 되어 그의 후손들이 살면서 두곡고택(杜谷古宅)이라 부르게 되었다.
뒷 마당을 넓게 잡고 행랑채와 디딜방아간을 둔 것이 특징이다. 넓은 대지에 토담을 둘러싸고 남향으로 대문간채를 두고 이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된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루는 튼 ㅁ 자형 중축부(中軸部)를 가운데에 두고 그 뒤안에 한 채의 행랑채, 방앗간채, 잿간을 두고 전면 노변에는 대문채를 멀찍이 배치하고 대문 안에는 서쪽에 마구간을 안배하는 배열을 보이고 있다. 북촌에서 ㄱ 자형이나 一자형이나 一자집들을 널리 산개한 예는 이향정(二香亭)이나 근암고택 등이 있다.
대문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되는 오막간채가 있다.
사랑마당에 남향한 사랑채 또한 一자형 평면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좌측 2칸은 대청이고 우측은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사랑채와 직각방향으로 행랑이 놓여있고 안채는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로 난 중칸을 통하여 출입하는 데 ㄱ 자형평면을 이루고 있다. 평면의 형태는 부엌과 안방이 남향으로 놓여 있고 대청과 건넌방이 서향한 ㄱ자로써 전형적인 서울지방형을 이루고 있다.
단 안방위 조그만 방이 붙어있고 이방에서도 대청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이방과 안방사이에는 문으로 다닐 수 있어 서울지방형에서 일는 웃방역활을 하고 있다. |
영당(影堂) |
이 영당은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공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곳으로서 1636년경의 건축물이다. 이곳에 모신 영정은 수졸당이 하양(河陽) 현감 재직시 선정을 베푼 보답으로 현민들이 그려서 가져온 것을 영당을 지어 모시게 된 것이다.
하양유림이 봉안하다가 임오년에 경주유림으로 넘기자 두곡(杜谷)에 영당을 건립하여 이안하였다고 한다. 매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전면에 삼문(三門)을 설치하고, 내부에 전퇴를 개방하는 법식에 맞추어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사당(祠堂)을 지었다. |
동호정(東湖亭) |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선생의 넷째 손자인 성균진사(成均進士) 이의잠(李宜潛)공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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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 ||||||||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 ||||||||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으로부터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두었는데,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다른 부분과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부엌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을 그리고 부엌 위쪽에는 작은 대청 2칸, 방 2칸 그리고 꺾이어서 큰 대청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 자리잡았다. 안채의 건넌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광 2칸과 마루 1칸을 두어 연결시키고 있다.
원래의 관가정은 양쪽 측면과 뒷면만을 담장으로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트이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경관을 보라보게 하였었으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내문을 내어 본래의 조망이 감소되었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다. 그러나 사랑대청에는 4개의 원주를 세웠고 주두를 얹어 초익공계로 꾸몄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한식기와를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 ||||||||
수운정(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 ||||||||
조선 선조 15년(1582년)경에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공의 증손인 청허재 손엽(淸虛 齋孫曄)공이 건립한 정자인데,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靑雲虛)의 뜻을 따서 수운정 (水雲亭)이라 했다.
마을 외곽 서북방의 높은 암석 위에 세워 안락천과 안강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수려한데, 특히 야경이 좋은 곳이다. 임진왜란때 태조의 수용영상(水容影像, 임금의 초상화)을 이 정자에 이안 (移安)하여 난을 피했다고 전한다. 정자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 한식기와집이다.
툇마루 아래에도 약간 높은 기둥을 설치하여 마치 누각처럼 보인다. 동측 2칸은 온돌방이고 서측 4칸은 대청이다. 행랑채는 온돌방과 마루가 1칸이다.
정자 변주는 모두 두리기둥이나 온돌방에 사용된 내진주만은 네모기둥의 모를 강하게 접어 사용하였다. 가구는 5랑가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행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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