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탑사 (馬耳山塔寺)
2018년 3월 30일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버티고 서있는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마이산 탑사아래로 500m 지점에 위치한 관광지가 있으니 이것이 탑영제 벗꽃길이다.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본래 관광풍치 조성을 위해 축조 되었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한다.
탑영제에서 탑사를 올려다보면 산에 가리워져 탑은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스님은 처음엔 신비감과 호기심에 관광차원으로 찾은 사람들을 부처님과 연을 맺어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포교라 강조하면서
"마이산 탑사를 찾는 많은 불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불교의 연을 잇는 관광 사찰로 더욱 발전시키겠다."며
"이제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고 설명하면서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또, 4대손인 진성스님과 함께 3억원을 투입, 미륵당 앞에 나한전을 짓고
종각, 요사채, 화장실 설치는 물론 주위 조경과 사찰 환경정화 사업을 사업을 완공 하였다.
혜명스님은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마이산 탑사문화재관리소장,
진안경찰서 치안행정자문위원회 회장,
진안 애향운동본부 본부장 등(진안애향본부장 및 마이산탑사 갑룡장학회를 10여년동안 운영하고 있으며
곧 장학재단도 설립중이며) 10여개가 넘는 사회사업직책을 가지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적인 스님상구현을 위해서는 생활에 뛰어들어 봉사활동 등
사회활동을 통해 포교를 하고 또 지역민과 한데 어울어져 지역발전에도 한몫을 담당하는게 제 나름대로의 생각입니다."며
사회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혜명스님.
스님의 이와같은 희망찬 포교의지에서 우리가 그려본 내일의 밑그림은 밝다.
1년에 약 1백 20여만명이 넘게 찾아오는 마이산 탑사에서 그 만큼의 사람들이 불자로 거듭날 때 불국토는 앞당겨질 것을 믿는다.
마이산이 된 산신부부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 나라에서 쫏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 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자시11시~01시)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 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화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 차고는 두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천길이 되는 데
연기와 안개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에도 또한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교묘함은 실로 끝이 없으니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일을 생각하도다.
-김종직(성종때의 성리학자)
옛시인의 노래에 등장한 임금은 바로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이 남행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짓기전에 이산은 신라때 서다산(서쪽에 많은 산들중에 가장 아름답게 쏫은산!, 쏫았다, 섯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용이 하늘로 쏫아 오를듯 한 기상) 이라 불렸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는 속금산(금을 묶어 놓은 금덩어리 산! .., 땅속에서 쏫아난 산 )이라고 이름 붙였다고도한다.
이중에서 서다산과 용출산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서다를 이두식 표기로 볼 때 그뜻은 '섯다'이고 그 한문식 표현은 용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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