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최첨단最尖端 병기兵器

◈ - 이지스함 / 6.25의 장진호 전투를 기억하는 USS Chosin (CG 65)

by 준원 김재훈 2008. 9. 21.

 

 



 

 

6.25의 장진호전투를 기억하는 USS Chosin (CG 65)

 

 

 

 6.25의 장진호전투를 기억하는 USS Chosin (CG 65)


 

 

 

 

 

 

 

 

 

 

미해군 타이콘데루가급 순양함중에는 6.25에서 중공군의 "삼겹살"

포위망을 처절하게 뚫고 나온 미해병대의 전투를 기리는 USS Chosin (CG 65)함이 있습니다.


지난 1월 9일 Tarawa Expeditionary Strike Group (ESG) 소속으로

페르시아만에서6개월간 임무를 수행한 USS Chosin (CG 65)함이 진주만으로 귀항한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4번빼까지 사진이 지난 1월 9일 입항모습입니다)

◆ 6.25와 장진호 전투와 미국

“우리나라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요청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ir country's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이 문구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공원의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다.

1995년 7월27일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반대하는 유엔 결의를 지지한

21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제막됐다.

한국전쟁 발발 45년 만에 이루어진 이 제막식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면서 나아가 21세기 새로운 한·미동맹관계의 발전을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사망 3만6940명·부상 9만2134명·실종 3737명·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것은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em is not free)라는 기념비의 글귀처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바친 거룩한 희생이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은 오랫동안 미국인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이 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했다.


89년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너무과소 평가되고 이해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국민의 한국전쟁에 대한 망각이 이 제막식 행사로 비로소 되돌아온 것이다.


◆"장진호 전투"

중공군 포위망 과감히돌파

“미 제1해병사단 : 전사 718명, 후송 후 사망 98명, 실종 192명, 부상 3504명의 전투 손실과 비전투 손실 3659명(대부분 동상)”
“중공군 : 전사 2500여 명, 부상 1만2500여 명.”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장진호에 배치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 극한 상황에서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소위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쌍방 피해 결과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으로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됐다. 병기는 얼어 붙고

특히 방한피복이 절대 부족해 쌍방 군대 절반 이상이 심한 동상에 걸렸다.

이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미 제1해병사단은 단순한 철수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an attack in another direction)이라는 스미스 사단장의 강철같은 의지 아래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케 됐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3차공세에 참여하지 못해,

3차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됐다.

장진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참전용사들은 몸서리치도록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83년 4월 6000여 회원으로 구성된 생존자협회를 결성,

그 명칭을 장진호 전투에서 아주 적게 살아 남았다는 뜻을 담고자 ‘Chosin Few’라고 붙였다.

‘Chosin Few’는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52개 지부를 두고 전쟁포로 문제와 동상 후유증 치료 등에 관해 자문을 받고 있다.

또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한국 재방문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일부 회원들은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책을 펴냈다.

수기는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의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의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 소설은 장교 출신

제임스 브래디의 ‘가을의 해병’(The Marines of Autumn) 등이 있다.

이 책들을 소개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보면 “밤새 통곡하며 읽었다”는 ‘Chosin Few’ 회원과 가족들의 독후감이 많이 올라 있다.

50여년 전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 쓰러져간 용사들과 처절했던 당시 기억을

간직한 채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는 ‘Chosin Few’ 회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리며

그 분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위 사진과 관련 오늘 비밀에 올려주신 댓글들

luftwaffe 왜 장진 이 Chosin 이라 표기되나?

라고 의문을 가졌는데 일본식 표기명 이라더군요.

당시 일본군이 만들은 지도를 미군도 사용했다더군요.2006-01-11

장영상 당시 대한민국은 신생정부라 충분한 지도제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축적대한민국전도를 상황실에서 사용하기도 했다는군요.

 

미군에게 지도를 얻어다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미군이 쓰던 지도는 한자와 영문표기가 되어있어 사용에 큰 무리는 없었다는군요.

지도부족때문에 국군은 지형정찰을 부지런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답니다....2006-01-11

Liverpool 인천함은 "인천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함정입니다.2006-01-11

불로산 Chos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용사들'이라는 뜻이지만

해병대나 특수 부대를 연상하게 하는 'Chosen Few'와 비슷하게 발음되어 이중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 흔히 이렇게 합니다.2006-01-11

 

 

http://blog.daum.net/ulsankebi/641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