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李相和)
이상화(李相和, 1901.4.5~1943.4.25)
1901년 대구(大邱) 출생. 호 상화(尙火).
1919년 서울 중앙고보를 3년 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
《개벽》지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늪의 우화>, <나의 침실로>, <석인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별을 하느니>, <나의 침실로> 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李相和 )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을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야,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 작품은 <나의 침실로>에서 보여 준 감상적, 관능적, 퇴폐적 낭만성을 극복하고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식민지 조국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쓴 저항시로 이상화의 후기 대표작이자,
일제 치하 30여 년 동안 발표된 수많은 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을 연상하게 하는 제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설의적 의문은 당시 현실 상황을 '빼앗긴' 모습으로 묘파함으로써 지난날 역사에 대한 강한 비판과 부정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주권과 영토는 물론 마지막 남은 역사와 민족혼마저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피력하고 있다.
첫째 연의 '땅'과 '들'은 모성적(母性的) 심상으로서의 역사 의식을 보여 준다.
그것은 국가적인 면에서는 영토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터전이요,
양식을 일구어내는 농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땅과 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나아가 그것의 상징으로서의 민족혼까지도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지난 역사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위기감과 박탈 의식은
마지막 연의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로 귀결됨으로써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자연의 이법 또한 빼앗길 것 같은 위기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위기감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연, 땅, 들, 민족혼,
역사 어느 한 가지도 빼앗길 수 없다는 적극적 저항 의지의 표출이자, 잘못된 역사를 몸소 바로잡겠다는 투철한 역사 의식의 표현이다.
이 시는 국토를 빼앗긴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을 노래한 작품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지만 우리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강렬한 저항 의식을 노래하고 있다.
30여 년 간의 식민지 치하에서 나온 현대시 중 그 현실 감각의 날카로움과 뜨거운 정열이 결합된 예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문제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빼앗긴 들'에 과연
참다운 생명의 삶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시인은 한 행으로 된 제1연에서 이 물음을 던지고, 마지막 연에서 이에 대답한다.
즉, 이 시의 서두와 종결은 각각 질문―대답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아홉 개의 연은 이러한 대답에 도달하기까지의 각성의 과정을 노래했다.
제재는 '봄의 들', '식민지 치하의 현실'. 주제는 '국권 회복에의 염원과 갈등'. 출전은 1926년
나의 침실로 / [이상화(李相和)
‘마돈나’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挑)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 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에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이상화의 초기시 세계를 대표하는 이 시는 {백조} 동인들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18세에 창작했다고 알려진 이 작품에는 식민지 치하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사춘기 소년의 낭만적 정열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한 젊은이로서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삶의 세계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죽음의 세계를 동경하고 예찬하는 것으로 굴절되고 만다.
이 작품은 '마돈나'․'침실'․'수밀도의 네 가슴'․'나의 아씨여' 등의 감각적 시어들로 말미암아 간단히 남녀간의 정욕을 노래한 애정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자아가 '마돈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는 '침실'은 육체적, 쾌락적, 본능적인 일반적 의미의 침실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 재생의 장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는 남녀간의 애정을 소재로 하여 관능적, 감상적, 낭만적 표현 방법에 의해 아름답고 영원한 꿈과 같은
안식처(安息處)를 갈구하는 내용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연부터 마지막 12연까지 시적 화자는 연속적으로 '마돈나'를 부름으로써 급박한 상황을 부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구석지고도 어두운 마음의 거리에서' 밝음이 오기 전에 '마돈나'가 오기를 간절히 애원하고 호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기 때문이다.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 [이상화(李相和)
― 간도 이민을 보고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間島)와 요동(遼東)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가도다
진흙을 밥으로,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아, 사노라, 사노라, 취해 사노라
자폭(自暴) 속에 있는 서울과 시골로
멍든 목숨 행여 갈까, 취해 사노라
어둔 밤 말없는 돌을 안고서
피울음을 울으면, 설움은 풀릴 것을 ―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취한 목숨, 죽여버려라!
'간도 이민을 보고'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일제의 온갖 수탈과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간도와 요동벌로 떠나가는 유이민(流移民)들의 고통을 통해 당대의 암울했던 현실 상황을 극명히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전 2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1연에서는 '쫓김'의 이미지가 주가 되어 간도 유이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2연에서는 자포자기에서 오는 갈등과 간도 이민의 수난상을 직시하면서 이 땅에 남아 처절한 삶을 부지해야 하는 아픔을 묘파하고 있다.
그에 따라 1연에서 어느 간도 유이민으로 설정되었던 시적 화자는 2연에서 이 땅에 남아 치욕스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통곡(痛哭) / [이상화(李相和)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
이 시는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식민지 백성들의 비탄과 적개심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일제에 의한 조국 강토의 강점으로 두 발을 뻗을 수도 없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존권마저
상실당한 당시 현실에 대한 강한 울분과 저항 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참담한 현실에 대한 절망감을 하소연하고자 하나, '하늘'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는커녕,
함께 나눌 수도 없는 초월적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춘망(春望) / [이상화(李相和)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성 안 봄에 풀과 나무만 무성하구나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시절을 생각하니 꽃이 도리어 눈물겹고
이별은 한스러워 새가 마음을 놀라게 한다.
52. 병적 계절(病的季節)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상화의 시 상당수에는 그가 처했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비관적 현실 인식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세상의 허위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로, 당대의 참담한 모습이 주로 '밤'과 '울음'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함께 그에 대한 회복의 갈망이 민족의 활화산으로 분출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밤'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지닌 의미는 대체로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슬픔과 고통의 이미지이며, 밤은 곧 '울음'과 '눈물' 등의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 인식은 마침내 식민지 치하의 참담한 상황하에서 보다 비극적으로 심화됨으로써
그의 시는 비관적 인식의 단계를 넘어서서 일체를 부정하는 태도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을 부정적 현실 인식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당대의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전면적 거부 태도라 할 것이다.
이 시는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식민지 치하의 파행적인 현실을 '병'의 이미지로 구체화하여
부정적인 현실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몽유병(夢遊病)>, <조선혼(朝鮮魂)>과 같은
작품처럼 '잃어버림'과 '멀어짐'의 이미지를 통해서 '젊은 조선'의 비극적인 상황을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 시詩 와 문학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김유정 (金裕貞) / 소낙비(소나기) (0) | 2009.03.03 |
---|---|
◈ - 이효석 (李孝石) / 메밀꽃 필 무렵 (0) | 2009.03.03 |
◈ - 심훈 (沈薰) / 그 날이 오면 (0) | 2009.02.28 |
◈ - 이상 (李箱) / 날개 (단편소설) 외 詩 11 편 (0) | 2009.02.28 |
◈ - 김유정 (金裕貞) / 단편소설 : 봄봄 (0) | 2009.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