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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佛敎 이야기

◈ - 불갑사 (佛甲寺) /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8 / 모악산

by 준원 김재훈 2013. 2. 1.

 

 

 

 

 

 

 

불갑사 (佛甲寺)

불갑사 http://www.bulgapsa.org / 모악산

                                                                                                                                                                2013년 1월 27일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