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 광한루원
CNN 선정한 / 국내관광지 100선 - 100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요천로 1447번지(천거동)
설립배경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조 성립 이후 궁궐의 후원을 꾸미면서 우리 조경문화는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의 토대 위에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광한루원은 바로 조선 전기 궁궐에서 완성된 조경문화가
널리 확산되는 과정의 산물이며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가득찬 독특한 누원이다.
광한루원은 최초 황희(黃喜)가 1419년 선조인 황감평(黃鑑平)이 지은 일재라는 서실을 헐고
누정을 새로 짓고 [광통루]라고 이름한테서 연유한다.
그 후 개축과 증축, 그리고 정원의 설치 등이 이루어져
오늘날 조선시대 정원을 대표하는 누원으로 변모 하였는데 그 문헌과 과정은 다음과 같다.
광한루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영주각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방장정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난간은 설치되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하였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하였다
완월정
옛날 옥황상제가 계식 옥경에는 광한전이 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완월정은 지상인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하여 전통 조선식 누각을 세워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해마다 이 누각 수중무대에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 축제인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
춘향관
춘향의 일대기를 9폭의 대형 화폭에 담아 춘향의 얼과 수절 정신을 민족혼으로 오래 기리고자 1992년 개관되었다
춘향사당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하였으나
6.25중에훼손되어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이러한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청허부
청허부는 광한루원의 정문이다.
이 건물은 1971년 최봉채 남원군수가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로
건평 약 11.83평에 맞배지붕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어졌는데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 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다
현 정문은 1970년도 당시에는 남원시장(해방 전까지는 전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시장이였다)과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우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 차 역사적 가치와 춘향이의 얼이 깃든 광한루원 주변을 정화하고자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당시 시장에 큰 화재가 일어나 폐허가 됨)
그 자리에 청허부를 세우고 정문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북문대신 이 문을 정문으로 대체하였다
우아한 곡선과 자연스런 풍우판 등을 가진 청허부는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주는 곳이다
정면의 중앙에는 일중(一中) 김충현이 쓴 청허부란 현액이 걸려 있는데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의 「광한 청허지부」에서 따온 것으로 이 문이 월궁의 출입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오작교
둘의 만남이 너무 애닳아 이날에는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가 모두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만들어 둘을 만나게 했는데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를 밟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이 비를 만들었다.
칠월칠석날이 되면 비가 오고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까치의 머리가 흰 것은 오작교가 된 까치의 머리를 견우와 직녀가 밟아 벗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같은 하늘나라 견우과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이도령,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다. 이러한 전설을 지상에 펼쳐놓은 것이
광한루원의 호수와 오작교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 오(烏), 까치(鵲), 다리(橋)자를 쓴다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월매집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해, 춘향이 살고 있는
월매집 부용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남원 축제 안내
기간 : 2월 중순 ~ 3월 중순
(063) 625-9015, 620-6616, 620-6646
전북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446-3번지 허브밸리
063-620-4892~7 남원허브축제추진위원회 사무국
지리산 바래봉 및 허브밸리 일원
(063) 634-0024
매년 4월 마지막주 금요일부터 개최 (5일간)
(063) 632-6183
매년 8월 15일(1일)
남원시 운봉애향회
전북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
063-620-6152 삼동굿 놀이 보존위원회
행사안내(뱀사골단풍제관련 자세히보기 (남원시청문화관광)
흥부제
매년 음력 9월 8일 - 9월 9 일(2일간)
(063) 620-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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