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들의 호(號)와 필명
강용준(前 제주문인협회장/희곡작가)
제주일보 / 제주논단 562호
며칠 전 아는 후배 문인으로부터 연하장을 받았는데, 말미에 ‘청계 김○○ 근배’ 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에는 이름만 썼었는데, 아마 누군가로부터 호를 받아서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나 이는 경우에 맞지 않은 쓰임이다.
요즘 일부 문인들 사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명 앞에 호를?붙여 쓰는 경우를 가끔 본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일가를 이룬 대가인 것처럼 예스럽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 이는 호(號)의 쓰임에 어긋나는 경우다.
호(號)란 본 이름을 피하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고 이는 삼국시대 이래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호는 대부분 후학이나 아래 사람들이 상대를 존경하여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데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사대부 양반들이 교류를 하면서 자신의 이름보다 호를 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호는 “본 이름이나 자 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이름. 별호(別號)”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에게 받는 이름을 명(名), 자라서 성인 의식을 치를 때 받는 이름을 자(字), 자신의 의지나 취향을 나타내어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을 자호(字號), 집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대신하는 것을 택호(宅號), 또는 당호(堂號)라 하고, 사후에 공덕이 있는 사람에게 나라에서 내려주는 이름을 시호(諡號), 존경하는 스승이나 친한 벗들이 지어주고 부르는 것을 아호(雅號)라고 한다.
이름은 보통 태어나면서 부모가 붙여준 것이기 때문에 본인보다 대부분 윗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니까,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이름 대신 자(字)와 호(號)를 썼다. 자(字)는 성인식을 치러 관(冠)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머리를, 호는 입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람은 갓으로써 성년을 상징하고 입으로써 인격체임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호(號)의 글자를 보면 ‘범이 입을 벌리고 큰소리로 부르짖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범이 울 호’에서 나온 글자로 범이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듯이 ‘외쳐 부르다’는 뜻을 가졌다.
호는 청룡(靑龍)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백호(白虎)를 나타내는데, 방위로서는 ‘서쪽’, 계절로는 오곡백과가 열매를 맺는 ‘가을’에 해당한다.
때문에 호는 봄·여름에 부지런히 갈고 닦아 가을이 되면 세상에 내놓고 널리 쓰인다고 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
호를 부를 때는 ‘춘원’, ‘춘원 선생’ 등으로 쓰인다.
그리고 자신이 작품들을 써서 드러낼 때는 ‘춘원 이광수’, ‘만해 한용운’하고 이름과 호를 같이 쓰는 일은 없다. 그냥 ‘春園(춘원) 씀’, ‘萬海 (만해)’ 하고 쓴다.
호는 스승이나 윗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보통이고, 지향하는 것, 좋아하는 물건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이 만들어 쓰기도 한다. 자신이 호를 쓸 때는 성에 호를 붙여 아예 필명으로 사용 (예:?이육사(원록), 이율곡(이), 김소월(정식))하기도 하지만, 미당(서정주), 청마(유치환)처럼 호만 따로 쓰는 게 원칙이다.
호는 겸손과 예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이 쓰기도 하지만 주로 남이 불러주는 것이다. 호와 이름을 같이 쓰는 것은 자기 이름 자 뒤에 선생이라고 쓰고 스스로를 높이는 허세처럼 보인다. 좋은 작품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다면 굳이 이름을 쓰지 않고 호만 써도 누군지 다 알아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문인은 이름값 할 수 있는 작품과의 승부가 먼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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