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에서 시를 읽다
제민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
김종호 시인 · 전 애월문학회장 · 논설위원
나의 하루는 새벽에 오름을 오르면서 문을 연다. 도보로 40여분 걸어서 고내오름 정상에 서면 아직 캄캄한 6시지만 새날의 기운이 동녘 하늘에 서려온다. 공허하여 우주를 품은 허공의 정막을 몇 아름 쯤 호흡하고 나면 나 또한 허공이 되어 한 없이 가볍다. 서쪽으로는 한림 협재, 동쪽으로는 제주시까지 띠를 두른 불빛들이 마치 은하수처럼 흐르고, 바다에도 아득히 겨울바다를 포획하는 불빛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저 치열한 삶의 모습들이 별빛처럼 아름답다.
문득 시장에서 고등어 한 마리를 두고 망설이던 생각이 떠오른다. 고등어 한 마리가 밥상에 오를 때 그것은 무한한 우주의 시공 속에서 아주 특별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닌가. '그래 네가 그 먼 바다를 건너 내게로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김지하 '님' 부분.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관계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우주의 역사, 곧 신의 섭리가 아닌가. 김지하 시인은 '사람 짐승 풀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교만과 욕망이 자연의 균형을 깨뜨려서 악성종양을 앓고 있는 지구가 애처롭다.
고내오름에는 해송 숲으로 울울하다. 나무들은 밀집하여도 어느 것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 하늘로 팔을 벌려 호흡을 하고 땅 속으로 뿌리를 뻗쳐 양분을 흡수하지만 서로 몸피를 줄이면서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온갖 풀들이 부드러운 양탄자처럼 깔려 있어도 그 좁은 틈새에서 큰소리 내는 법이 없이 사이좋게 숲을 이룬다. 숲이란 새삼 놀랍고 아름다운 조화가 아닌가.
"광화문 지하도를 건너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정희성 '숲' 부분.
인류의 비극은 내가 너무 크고, 네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하고 숲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도 근본은 숲의 백성인데 숲을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모국어를 잃고, 길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나를 보자 기겁을 하는 노루를 보면서 자연과 괴리되어 괴물이 된 내 모습을 떠올린다.
싸 - 바람이 스치자 활엽수의 넓은 잎들이 팽글팽글 내린다. 여름내 열매를 키우던 것들이 번트를 대어 주자를 살리고 타석을 벗어나는 야구선수처럼 보인다. 여섯 자식을 훌륭히 키운 어느 할머니가 치매로 정신을 놓고 요양원에서 무료한 시선을 허공에 팔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할 일을 마치고 무대를 떠나는 배우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가을엽서'전문.
'가을엽서'를 웅얼거리다보니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이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였다.
고내오름을 내려오면서 등산가 박영석 대장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구의 최고봉에 올랐을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는 "아무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하면 사고 없이 잘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등산은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려올 때 잘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께서 올라갈 때는 참 멋있더니 내려올 때는 하나 같이 쿵덕쿵덕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바라건대 12월19일 대선에 도전하는 박, 문씨여!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내려올 때 잘하시라! 그래서 역사에 빛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시라!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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