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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회文學會 소식消息

◈ - 아침을 열며 / 김종호 시인

by 준원 김재훈 2013. 11. 16.

 






[아침을 열며] 

 





김종호 시인 ·  전 애월문학회장· 논설위원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 동·서양의 지역적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것은 형과 색에 의한 작가만의 독특한 개성표현이며,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양화에 대해 동양화(주로 한국·중국·일본의 회화)라 할 때 그 것은 지역의 오랜 전통과 사상, 정서적 특성을 이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화의 유성물감과 캔버스에 대해 종이와 비단에 수묵이라는 표현재료의 차이라던가, 서양화가 원근의 표현 및 빛의 변화에 따르는 음영과 색의 변화를 다분히 과학적·입체적·객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동양화에서는 주로 선과 수묵담채로 평면적·주관적·정신적 표현을 중시하고 있다. 특히 정신적이라고 할 때 '여백표현'이 그 위주가 될 것이다.


한국화에서 '여백'은 아무 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의도에 의한 과감히 생략된 공간이다. 이러한 표현은 수묵의 자연스런 번짐과 대비를 통해 빈 공간을 남겨 두지만 오히려 완성도 높은 경지를 표현함에 자연스럽다.

여백은 감상자의 '이해' 속에 완성된다할 것이며, 감상자는 연상 작용으로 표현되지 않은 모습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선의 효과적 집중과 느긋함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것은 빈틈없이 꽉 채워진 답답함과 갑갑함에서 해방되는 여유로움으로 곧 '여백'의 효과일 것이다




이 여유로움, 생각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슬프다.


우리는 단기간의 산업화과정에서 농본사회의 대가족제도가 붕괴되고 무한 분화된 직업에 따라 핵가족 시대에 살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부요한 삶을 누리면서도 꽉 막힌 공간과 짓눌린 갑갑함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무한 무한경쟁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젊은이들, 열정도 꿈도 적성도 패기도 없이 저만치 위축돼 있다. 그런 자식들을 바라보는 이 나라의 부모들은 슬프고, 끝을 모르는 뒷바라지에 고달프다.

최저생계에 목을 매는 사람들과 내 집 마련의 꿈이 하우스푸어로 전락한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또한 슬프다. 눈코 뜰 새 없이 급박한 변화 속에서 세인이 선망하는 재벌 총수들도 업무추진과정에서 과도한 스트레스와 강박증에 시달린다는 그들의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위를 쳐다보는 목마름보다는 눈의 높이를 낮추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꽉 막힌 현실 앞에서 기대치를 조금 낮추면 오히려 즐기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리 한 번 못 펴보고 죽는 개미보다 꽃을 즐기면서 필요치를 해결하는 나비의 삶도 있다. 어디까지나 인생관과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젊은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과 여유가 재산이다. 싸이의 선풍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에 고이지 않고 전혀 생각지 않은 발상으로 확실하게 입지를 세우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신선하다.

도시 주변에서 맴돌기 보다는 과감히 산골로 들어가 새로운 작물 재배와 가공기술을 개발해 농촌을 변화시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실로 감동적이다. 여유와 재치, 이것이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효소가 아닐까.


일이란 성취되는 순간 또 다른 성취를 위해 매달리게 되는 것, 먼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핍절한 몸과 마음과 의식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이 여유가 아닐까



예술은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정신적인 안정과 균형, 그리고 여유로움을 공급해 준다. 땀 흘리며 일하다가 허리 한 번 펴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숲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는 있어야 하겠다. 팍팍한 생활 속에서 시집을 한 권을 읽는다거나 좋은 음악을 듣는 의도적인 공간 즉 삶의 여백을 마련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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