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盧天命)
노천명(盧天命,1912~1957). 황해도 장연 출생.
5세때 홍역으로 사경을 넘겼하여 본명인 기선(基善)을
천명(天命)으로 고친 채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장으로 자랐다.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 졸업.
이화 여자 전문 영문과 졸업.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다.
1932년 <신동아>지에 <밤의 찬미>를 발표한 이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6년 <이화 70년사>를 편찬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57년 3월에 뇌빈혈로 입원했다가 6월에 사망했다.
시집으로는 <산호림>(1938),<창변>(1945),<별을 쳐다보며>(1953),<사슴의 노래>(1958),<노천명 시집>(1972)등이 있다.
노천명은 1912년 황해도 장연에서 사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주이면서 무역에서 성공한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천명이 어린 시절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노루 사냥을 하여 피를 먹이는 자상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옥루몽'을 읽어 주는 등 문학적 감수성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천명에게 있어 장연에서의 어린 시절은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고향 산천에서의 어린 시절은 그의 감수성을 더욱 고조시켰고
훗날 그의 시에 많이 반영된다고 한다.
애수와 고독에 잠긴 삶
노천명은 아버지가 죽자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진명여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진명여학교에서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이 때 뛰어난 어휘력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을 들었으며, 단거리 달리기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진명여고보 시절 천명의 성격은 애수와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편모슬하에서 자란 점, 어린 동생의 죽음,
낯선 도시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 등으로 언제나 그에게는 애수와 고독이 따라 다녔다.
진명여고보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천명은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던 때가 이상에 불타고 시를 향한 열의가 강했던 때였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부간도의 용정과 연길 등지를 여행했다.
돌아와서는 '여성'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 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했다.
6.25남침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임화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도 하였다.
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 죽었다.
그의 인생, 그의 작품
노천명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에 발표한 시는 '고성허에서', '뒤에 만월대로 개작','밤의 찬미','제석' 등이 있다.
졸업 후는 '내 청춘의 배는' '우마차' '낯선 거리' 등을 발표하면서 촉망받는 시인으로 떠올랐다.
'사슴' '슬픈 그림' 등의 작품은 노천명 특유의 고독과 향수가 젖어있다.
그 외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집필한 '산다는 일' '자동차'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 '별을쳐다보며' 등은
현실의 비애에서 오는 고발,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들과 허무한 인간사에 대한 괴로움을 담았다.
그의 빛나는 작품 들 속에는 모두 그의 인생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시, 곧 삶
노천명은 시와 자신의 생애를 가능한 밀착시키려 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추억으로부터 오는 고독에서 도회의 문명에서 오는 고독,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오는 고독,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향수 등 다양한 정서를 보여주었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불행했던 한국의 역사와 더불어 가슴을 적시며 다가온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비극의 시대를 살아간 외로운 시인 노천명을 잊지 못하게 한다.
우리 문학의 질을 한 단계 높여 주며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한 노천명의 업적과 그의 아름다운 시는 길이 보전될 것이다.
사슴 / 노천명(盧天命)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盧天命)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푸른 오월 / 노천명(盧天命)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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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盧天命)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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