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金東里)
1913. 11. 24 경북 경주~1995. 6. 17 서울. 소설가.
인간성 옹호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을 지향했으며
8·15해방 직후 좌익문단에 맞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본명은 시종(始鍾). 이명은 창귀(昌貴). 아명은 창봉...
무녀도(巫女圖) 김동리(金東里)
뒤에 물러 누은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래벌에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 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버지가 장가를 들던 해라 하니, 나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이전의 일이다.
우리 집은 옛날의 소위 유서 있는 가문으로, 재산과 문벌로도 떨쳤지만, 글 하는 선비란 것도 우글거렸고,
특히 진귀한 서화와 골동품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손꼽힐 만큼 높이 일컬어졌었다.
그리고 이 서화와 골동품을 즐기는 취미는 아버지에서 다시 손자로 대대 가산과 함께 물려져 내려오는 가풍이기도 했다.
우리 집 살림이 탁방난 것은 아버지 때였으나, 그즈음만 해도 아직 옛날과 다름없이 할아버지께서는 사랑에서 나그네를 겪으셨고,
그러자니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이 끊일 새 없이 찾아들곤 하였다. 그 무렵이라 한다.
온종일 흙바람이 불어 뜰 앞엔 살구꽃이 터져 나오는 어느 봄날 어스름 때였다.
색다른 나그네가 대문 앞에 닿았다.
동저고리 바람에 패랭이를 쓰고 그 위에 명주 수건을 잘라맨, 나이 한 쉰 가까이 되어 뵈는, 체수도 조그만 사내가 나귀 고삐를 잡고서고,
나귀에는 열예닐곱쯤 나 뵈는, 낯빛이 몹시 파리한 소녀 하나가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남자 하인과 그 상전의 따님 같아도 보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 사내는,
"이 여아는 소인의 여식이옵는데, 그림 솜씨가 놀랍다 하기에 대감의 문전을 찾았삽내다."
소녀는 흰 옷을 입었었고, 옷빛보다 더 새하얀 그녀의 얼굴엔 깊이 모를 슬픔이 서리어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
"나이는?"
"……"
주인이 소녀에게 말을 건네 보았었으나, 소녀는 굵은 두 눈으로 한 번 그를 바라보았을 뿐 입을 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비가 대신 입을 열어,
"여식의 이름은 낭이(琅伊), 나이는 열일곱 살이옵고……"
하더니, 목소리를 더 낮추며,
"여식은 가는귀가 좀 먹었습니다."
했다.
주인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내를 보고, 며칠이든지 묵으며 소녀의 그림 솜씨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들 아비 딸은 달포 동안이나 머물러 있으며, 그림도 그리고 자기네의 지난 이야기도 자세히 하소연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들이 떠나는 날에, 이 불행한 아비 딸을 위하여 값진 비단과 충분한 노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나귀 위에 앉은 가련한 소녀의 얼굴에는 올때나 조금도 다름없는 처절한 슬픔이 서려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소녀가 남기고 간 그림―이것을 할아버지께서는 '무녀도'라 불렀지만―과 함께 내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오 리쯤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 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 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리인 채 옛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괴는 대로 일 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며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
이 도깨비굴같이 낡고 헐리인 집 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낭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경주읍에서 칠십 리 가량 떨어져 있는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 가게를 보고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낭이를 세상에 없이 끔찍이 생각하는 터이므로,
봄·가을철이면 분 잘 핀 다시마와 조촐한 꼭지미역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녀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욱이(昱伊)가 돌연히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도깨비굴 속에 그녀들을 찾는 사람이라야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과 봄 가을에 한 번씩 낭이를 찾아 주는 그녀의 아버지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왕래도 없이 살아가는 쓸쓸한 어미, 딸이었을 것이다.
간혹 원근 동네에서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어도 아주 방문 앞까지 들어서며,
"여보게, 모화네 있는가?"
"여보게, 모화네."
하고, 두세 번 부르도록 대답이 없다가,
아주 사람이 없는 모양이라고 툇마루에 손을 짚고 방문을 열려고 하면 그 때서야 안에서 방문을 먼저 열고 말없이 내다보는 계집애 하나―― 그녀의 이름이 낭이었다.
그럴 때마다 낭이는 대개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놀라 붓을 던지며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와들와들 떨곤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모화는 어느 하루를 집구석에서 살림이라고 살고 있는 날이 없었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성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나 해가 서쪽 산마루에 걸릴 무렵에야 돌아오곤 했다. 술이 얼근해서 수건엔 복숭아를 싸들고 춤을 추며,
"따님아, 따님아, 김씨 따님아,
수국 꽃님 낭이 따님아,
용궁이라 들어가니,
열두 대문이 다 잠겼다.
문 열으소, 문 열으소,
열두 대문 열어 주소."
청승 가락을 뽑으며 동구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화네, 오늘도 한 잔 했구나."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하면 모화는 수줍은 듯이 어깨를 비틀며,
"예에, 장에 갔다가요."
하고, 공손스레 절을 하곤 하였다.
모화는 굿을 할 때 이외에는 대개 주막에 가 있었다.
그만큼 모화는 술을 즐기었고 낭이는 또한 복숭아를 좋아하며 어미가 술이 취해 돌아올 때마다 여름 한철은 언제나 그녀의 손에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따님 따님, 우리 따님."
모화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도 이렇게 가락을 붙여 낭이를 불렀다.
낭이는 어릴 때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어미의 품에 뛰어들어 젖을 빨듯, 어미의 수건에 싸인 복숭아를 받아 먹는 것이었다.
모화의 말을 들으면 낭이는 수국 꽃님의 화신(化神)으로, 그녀(모화)가 꿈에 용신(龍神)님을 만나 복숭아 하나를 얻어먹고 꿈꾼 지 이레 만에 낭이를 낳은 것이라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수국 용신님은 따님이 열두 형제였다.
첫째는 달님이요, 둘째는 물님이요, 셋째는 구름님이요……
이렇게 열두째는 꽃님이었는데, 산신님의 열두 아드님과 혼인을 시키게 되어 달님은 햇님에게, 물님은 나무님에게,
구름님은 바람님에게, 각각 차례대로 배혼을 정해 나가려니까 막내따님인 꽃님은 본시 연애를 좋아하시는 성미라,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미처 기다릴 수 없어, 열한째 형인 열매님의 낭군님이 되실 새님을 가로채어 버렸더니 배필을 잃은 열매님과 나비님은 슬피 울며, 제작기 용신님과 산신님께 호소한 결과 용신님이 먼저 크게 노하고 벌을 내려 꽃님의 귀를 먹게 하시고, 수국을 추방하시니, 꽃님에서 그만 복사꽃이 되어 봄마다 강가로 산기슭으로 붉게 피지만 새님이 가지에 와 아무리 재잘거려도 지금까지 귀가 먹은 채 말 없는 벙어리가 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모화는 주막에서 술을 먹다 말고, 화랑이(박수)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다 말고, 별안간 미친 것처럼 일어나 달아나곤 했다.
물으면 집에서 따님이 자기를 부르노라고 했다.
그녀는 수국 용신님께서 낭이 따님을 잠깐 자기에게 맡겼으므로 자기는 그 동안 맡아 있는 것뿐이라 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만약 이 따님을 정성껏 섬기지 않으면 큰어머님 되시는 용신님의 노염을 살까 두렵노라 하였다.
낭이뿐 아니라, 모화는 보는 사람마다 너는 나무 귀신의 화신이다,
너는 돌 귀신의 화신이다 하여, 결핏하면 칠성에 가 빌라는 둥 용왕에 가 빌라는 둥 했다.
모화는 사람을 볼 때마다 늘 수줍은 듯, 어깨를 비틀며 절을 했다. 어린애를 보고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했다.
때로는 개나 돼지에게도 아양을 부렸다.
그녀의 눈에는 때때로 모든 것이 귀신으로만 비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뿐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뭇가지, 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 사람같이 보여지곤 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님'이라 불렀다.
욱이가 돌아온 뒤부터 이 도깨비굴 속에는 조금씩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부엌에 들어서기를 그렇게 싫어하던 낭이도 욱이를 위하여는 가끔 밥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오직 컴컴한 어둠과 별빛만이 차 있던 이 허물어져가는 기와집 처마 끝에도 희부연 종이 등불이 고요히 걸려지곤 했다.
욱이는 모화가 아직 모화 마을에 살 때, 귀신이 지피기 전,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사생아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척 총명하여 신동이란 소문까지 났으나, 근본이 워낙 미천하여 마을에서는 순조롭게 공부를 시킬 수가 없어,
그가 아홉 살 되었을 때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어느 절간에 보낸 뒤,
그 동안 한 십 년 간 까맣게 소식조차 묘연하다가 얼마 전 표연히 이 집에 나타난 것이었다.
낭이와는 말하자면 어미를 같이하는 오뉘뻘이었다.
낭이가 대여섯 살 되었을 때 그 때만 해도 아직 병으로 귀가 멀기 전이라 '욱이,' '욱이'하고 몹시 그를 따르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욱이가 절간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낭이는 자리에 눕게 되어 꼭 삼 년 동안을 시름시름 앓고 나더니,
그 길로 귀가 멀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귀가 어느 정도로 먹은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두 번 그의 어미를 향해 어눌하나마,
"우, 욱이 어디 가아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절에 공부하러 갔다."
"어어디, 절에?"
"지림사, 큰 절에……"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모화 자신도 사실인즉 욱이가 어느 절에 가 있는지 통 모르고 있었고,
다만 모른다고 하기가 싫어서 이렇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모화는 장에서 돌아와 처음 욱이를 보았을 때, 그 푸른 얼굴에 난데없는 공포의 빛이 서리며,
곧 어디로 달아날 것같이 한참 동안 어깨를 뒤틀고 허둥거리다가 말고 별안간 그 후리후리한 키에 긴 두 팔을 벌려,
흡사 무슨 큰 새가 저희 새끼를 품듯 달려들어 욱이를 안았다.
"이게 누고, 이게 누고? 아이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모화는 갑자기 목을 놓고 울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늬가 왔나, 늬가 왔나?"
모화는 앞뒤도 살피지 않고 온 얼굴을 눈물로 씻었다.
"오마니, 오마니."
욱이도 어미의 한 쪽 어깨에 볼을 대고 오래도록 울었다. 어미을 닮아 허리가 날씬하고 목이 가는 이 열아홉 살 난 청년은 그 동안 절간으로 어디로 외롭게 유랑해 다닌
사람 같지도 않게,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낭이도 그 때에야 이 청년이 욱이인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모양이었다.
처음 혼자 방에 있는데, 어떤 낯선 청년이 와서 방문을 열기에 너무도 놀라고 간이 뛰어 말―표정으로도―한 마디도 못 하고 방구석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낭이는 그 어머니가 욱이를 얼싸안고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며 우는 것을 보고 어쩌면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낭이는 그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인정이 있다는 것을 보자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그러나 욱이는 며칠을 가지 않아 모화와 낭이에게 알 수 없는 이상한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는 음식을 받아 놓고나, 밤에 잠을 자려고 할 때나,
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반드시 한참 동안씩 주문(呪文) 같은 것을 외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틈틈이 품 속에서 조그만 책 한 권을 꺼내어 읽곤 하는 것이었다. 낭이가 그것을 수상스레 보고 있으려니까 욱이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너도 이 책을 읽어라."
하고 그 조그만 책을 낭이 앞에 펴 보이곤 했다.
낭이는 지금까지 <심청전>이란 책을 여러 차례 두고 읽어서 국문쯤은 간신히 읽을 수 있었으므로,
욱이가 내놓은 그 조그만 책을 들여다보니,
맨 처음 껍데기에 큰 글자로 <신약 전서>란, 넉자가 똑똑히 씌어져 있었다. <신약전서>란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다.
<중략>
모화 집 마당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잡풀이 엉기고 늙은 개구리와 지렁이들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동안 거의 굿을 나가지 않고, 매일 그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 잡초 속에서 혼자서 징, 꽹과리만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화가 인제 아주 미친 것이라 하였다.
모화는 부엌에다 오색 헝겊을 걸고, 낭이의 그림으로 기를 만들어 달고는, 사뭇 먹기조차 잊어버린 채 입술은 먹같이 검어지고 두 눈엔 날로 이상한 광채가 짙어갔다.
"서역 십만리 예수 귀신 돌아간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두 귀에 방울 달고 왈강달강 왈강달강,
엇쇠 귀신아 썩 물러거가라.
자늬 아니 가고 봐 하면, 쉰 길 청수에, 엄나무 바알에, 무쇠 가마에, 흰말 가죽 너이 자자손손을 다 가두어 죽일란다. 엇쇠! 귀신아!"
그녀는 날마다 같은 푸념으로 징, 꽹과리를 울렸다. 혹 술잔이나 가지고 이웃사람이 찾아가,
"모화네, 아들 죽고 섭섭해서 어쩌나?"
하면 그녀는 다만,
"우리 아들은 예수 귀신이 잡아갔소."
하고 한숨을 내쉬곤 했다.
"아까운 모화 굿을 언제 또 볼꼬?"
사람들은 모화를 아주 실신한 사람으로 치고 이렇게 아까워하곤 했다.
이러할 즈음에 모화의 마지막 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났다. 읍내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래 모화는 비단 옷 두 벌을 받고 특별히 굿을 응낙했다는 말도 났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화가 이번 굿에서 딸(낭이)의 입을 열게 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났다.
"흥,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지."
이렇게 장담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들끓었다.
그들은 놀랍고 아쉬운 마음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모여 들었다.
굿이 열린 백사장 서북쪽으로는 검푸른 소 물이 깊은 비밀과 원한을 품은 채 조용히 굽이 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주구리 하나 들어간다는 이 깊은 소에는 해마다 사람이 하나씩 빠져 죽기 마련이라는 전설이 있다.)
백사장 위에는 수많은 엿장수, 떡장수, 술가게, 밥가게 들이 포장을 치고, 혹은 거적을 두르고 득실거렸고,
그 한복판 큰 차일 속에서 굿은 벌어져 있었다.
청사, 홍사, 녹사, 백사, 황사의 오색사 초롱이 꽃송이같이 여기저기 차일 아래 달리고 그 초롱불 밑에서 떡시루, 탁주 동이, 돼지 통새미 들이 온 시루, 온 동이,
온 마리째 놓인 대감상, 무더기 쌀과 타래 실과 곶감 꼬치, 두부를 놓은 제석상과, 삼색 실과에 백설기와 소채 소탕에 자반, 유과 들을 차려 놓은 미륵상과,
열두 가지 산채로 된 산신상과, 열두 가지 해물을 차린 용신상과,
음식이란 음식마다 한 접시씩 놓은 골목상과,
냉수 한 그릇만 놓은 모화상과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전물상들이 쭉 늘어 놓아져 있었다.
이 날 밤 모화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정숙하고 침착한 빛이 서려 있었다.
어제같이 아들을 잃고 또 새로 들어온 예수교도들로부터 가지각색 비방과 구박을 받아 오던 그녀로서는 의아스러울이만큼 새침하게 갈앉아 있어,
전날 달밤으로 산에 기도를 다닐 적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전날과 같이 여러 사람 앞에서 아양을 부리거나 수선을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호화스러운 전물상들을 둘러보고도 만족한 빛 한번 띠지 않고, 도리어 비웃듯이 입을 비쭉거렸다.
"더러운 년들, 전물상만 차리면 그만인가."
입 밖에 내어 놓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자리에서는 모화가 오늘밤 새로운 귀신이 지핀다고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돌연히,
"아 죽은 김씨 혼신이 덮였군."
하자 다른 여자들도,
"바로 그 김씨가 들렸다. 저 청승맞도록 정숙하고 새침한 얼굴 좀 봐라.
그리고 모화네가 본디 어디 저렇게 이뻤나, 아주 김씨를 덮어 썼구먼."
이렇게들 수군댔다. 이와 동시, 한쪽에서는 오늘 밤 굿으로 어쩌면 정말 낭이가 말을 하게 될 게라는 얘기도 퍼졌고, 또 한쪽에서는 낭이가, 누구 아이인지는 모르지만
배가 불러 있다는 풍설도 돌았다. ……하여간 이 여러 가지 소문들이 오늘 밤 굿으로 해결이 날 것이라고 막연히 그녀들은 믿고 있는 것이었다.
모화는 김씨 부인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물에 빠져 죽을 때까지의 사연을 한참씩 넋두리하다가는 전악들의 젓대, 피리, 해금에 맞추어 춤을 덩실거렸다.
그녀의 음성은 언제보다도 더 구슬펐고 몸뚱이는 뼈도 살도 없는 율동(律動)으로 화한 듯 너울거렸고…… 취한 양,
얼이 빠진 양 구경하는 여인들의 숨결은 모화의 쾌잣자락만 따라 오르내렸다.
모화의 쾌잣자락은 모화의 숨결을 따라 나부끼는 듯했고, 모화의 숨결은 한 많은 김씨 부인의 혼령을 받아 청승에 자지러진 채,
비밀을 품고 조용히 굽이 돌아 흐르는 강물(예기소의)과 함께 자리를 옮겨 가는 하늘의 별들을 삼킨 듯했다.
밤중이나 되어서였다.
혼백이 건져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랑이들과 작은 무당들이 몇 번이나 초망자(招亡者) 줄에 밥그릇을 달아 물 속에 던져도 밥그릇 속에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초혼에 응하질 않는 모양이라 하였다.
작은 무당 하나가 초조한 낯빛으로 모화의 귀에 입을 바짝 대며,
"여태 혼백을 못 건져서 어떡해?"
하였다.
모화는 조금도 서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손수 넋대를 잡고 물가로 들어섰다.
초망자 줄을 잡은 화랑이는 넋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초혼 그릇을 물속에 굴렸다.
"일어나소 일어나소,
서른 세 살 월성 김씨 대주 부인,
방성으로 태어날 때 칠성에 복을 빌어."
모화는 넋대로 물을 휘저으며 진정 목이 멘 소리로 혼백을 불렀다.
"꽃같이 피난 몸이 옥같이 자란 몸이,
양친 부모도 생존이요, 어린 자식 뉘어 두고,
검은 물에 뛰어들 제 용신님도 외면이라,
치마폭이 봉긋 떠서 연화대를 타단 말가,
삼단머리 흐트러져 물귀신이 되단 말가."
모화는 넋대를 따라 점점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옷이 물에 젖어 한 자락 몸에 휘감기고,
한 자락 물에 떠서 나부꼈다. 검은 물은 그녀의 허리를 잠그고, 가슴을 잠그고,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녀는 차츰 목소리가 멀어지며 넋두리도 허황해지기 시작했다.
"가자시라 가자시라 이수중분 백로주로,
불러 주소 불러 주소 우리 성님 불러 주소,
봄철이라 이 강변에 복숭아 꽃이 피그덜랑,
소복 단장 낭이 따님 이내 소식 물어 주소,
첫 가지에 안부 묻고, 둘째 가……."
할 즈음, 모화의 몸은 그 넋두리와 함께 물 속에 아주 잠겨 버렸다.
처음엔 쾌잣자락이 보이더니 그것마저 잠겨 버리고, 넋대만 물 위에 빙빙 돌다가 흘러내렸다.
열흘쯤 지난 뒤다.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 가게를 보고 있다던 체수 조그만 사내가 나귀 한 마리를 몰고 왔을 때,
그 때까지 아직 몸이 완쾌하지 못한 낭이가 퀭한 눈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사내는 낭이에게 흰죽을 먹이기 시작했다.
"아버으이."
낭이는 그 아버지를 보자 이렇게 소리를 내어 불렀다.
모화의 마지막 굿이(떠돌던 예언대로) 영검을 나타냈는지 그녀의 말소리는 전에 없이 알아들을 만도 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여기 타라."
사내는 손으로 나귀를 가리켰다.
"……."
낭이는 잠자코 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귀 위에 올라 앉았다.
그네들이 떠난 뒤엔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그 무성한 잡풀 속에서 모기들만이 떼를 지어 울었다.
▶ 줄거리 요약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널따랗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우리 집에 있는 무녀도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경주읍에서 십여 리 떨어진 집성촌 마을의 퇴락한 집에 사는 모화는 무녀였다.
그녀는 세상 만물에 귀신이 들어앉아 있다고 믿었으며, 그녀의 생활은 굿이 그 전부였다.
그녀의 식구는 넷이었는데, 남편은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해변가로 나가 혼자 해물 장수를 하고 있었고,
아들 욱이는 무당의 사생아로서 동네에서 배겨나기가 힘겨워, 몇 해 전에 마을을 나가고 없었으므로,
집에는 그녀와 고명딸 낭이의 두 모녀가 앙상히 살아가고 있었다.
낭이는 귀머거리 소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한 화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그림만 그렸다. 한편 모화는 매일 술만 마셨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낭이를 소중히 했다. 모화는 낭이를 낳을 때의 태동으로 짐작해서 낭이를 용신(龍神- 용왕)의 딸의 화신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몇 해 두고 소식이 없던 욱이가 돌아왔다. 모화는 기뻐서 안고 울었다.
그러나 이윽고 욱이가 예수교에 귀의했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 때부터 그녀는 욱이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아들을 위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데, 욱이는 욱이대로 어머니에게 마귀가 붙었다고 걱정했으며, 마태복음에 적혀 있듯이 낭이가 귀머거리가 된 것도 그 탓으로 알았다.
그는 하느님께 어머니와 누이를 구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잘 때도 언제나 성경을 가슴에 품고 잤다. 어떤 날 밤, 욱이는 잠결에 가슴이 허전함을 느꼈다.
깨어보니 성경이 없었다. 때마침 부엌에 불이 밝혀져 있는데, 어머니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성경 첫 장을 불에 태우고 있었다. 그는 부리나케 뛰어 나가 성경을 뺏으려 했다.
그 때 머리 위로 식칼이 날았다. 그녀의 눈에는 욱이가 예수 귀신으로 보였다.
그는 기어코 세 곳에 칼을 맞고 넘어졌다. 그녀는 그로부터 두문불출하고 아들의 병을 간호했다.
그 사이 이 마을에도 교회가 서고 예수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도들은 무속을 비방하며 돌아다녔다.
교회는 욱이의 청으로 목사가 주선해서 세웠던 것이다. 욱이는 기어코 소생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는 예수 귀신이 욱이를 잡아갔다고 말했으며, 매일 같이 귀신 쫒는 주문을 외었다.
달포가 지났을 때, 그녀는 물에 빠져 죽은 젊은 여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날 따라 어느 때보다 정숙했다.
외아들을 잃은 데다가 예수교도로부터 박해까지 받고 사는 모화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예쁘게 보였다. 그녀는 신나게 굿을 했다.
그것은 그녀는 이제 이 괴로운 세상을 떠나 용신에게 귀의할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여인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여인이 죽은 못 속으로 넋대를 쥐고 하염없이 들어갔다.
그녀는 마침내 꼭지물이 가까운 곳까지 가서는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봄철에 꽃 피거든 낭이더러 찾아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기어코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모화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난 어떤 날, 낭이의 아버지는 나귀 한 마리를 몰고 모화의 집으로 왔다.
그는 낭이를 나귀에 태우고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곳곳으로 귀한 집을 찾아다니며,
그녀는 무녀의 그림을 그려주고, 아버지는 낭이에 대한 내력을 이야기하고는 대가를 받으면서 정처 없이 또 돌아다녔다.
낭이는 잠자코 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귀 위에 올라 앉았다.
그들이 떠난 뒤엔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그 무성한 잡풀 속에서 모기들만이 떼를 지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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