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詩 와 문학文學

◈ - 주요한 (朱耀翰) / 불놀이 외 16 편

by 준원 김재훈 2009. 3. 4.

 

 

 

 

 

 

주요한 (朱耀翰)

 

 

주요한 [朱耀翰, 1900.10.14~1979.11.17]

 

 

호 송아(頌兒). 평남 평양(平壤) 출생.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東京]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장[滬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불놀이 / 주요한 (朱耀翰)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 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 막히는 불꽃의 고통(苦痛)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四月)달 따스한 바람이 강(江)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여린 기생의 노래, 뜻 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밑창에 맥없이 누우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男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大同江)을 저어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靑年)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確實)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가신 누님

 


강남 제비 오는 날

새 옷 입고 꽃 꽂고

처녀 색시 앞뒤 서서

우리 누님 뒷산에 갔네.

 


가서 올 줄 알았더니

흙 덮고 금 잔디 덮어

병풍 속에 그린 닭이

울더라도 못 온다네.

섬돌 위에 봉사꽃이

피더라도 못 온다네.

 

 

 

가을은 아름답다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 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 주요한 (朱耀翰)

 


꽃이 핀다, 님의 웃음이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핀다.

그 꽃을 손으로 꺾었더니

꽃도 잎도 다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님의 웃음

마음속 길이 간직했더니

그 속에 피어나 꽃이 되어

이 타는 속을 미칠 듯이.

 

 

 

남국의 눈 / 주요한 (朱耀翰)

 


푸른 나뭇잎에 나려 쌓이는

남국의 눈이 옵니다.

 


오늘밤을 못 다 가서 사라질 것을---

설은 꿈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푸른 가지위에 피는 흰 꽃은

설은 꿈같은 남국의 눈입니다.

 


젊은 가슴에 당치도 않은

남국의 때 아닌 흰 눈입니다.

 

 

 

 

 

명령 / 주요한 (朱耀翰) 

 


사랑이 오라 오면

불로라도 물로라도 아니 가오리까

사랑이 손짓하여 부르면

험한 것을 사양하오리까?

사랑이 오오 사랑이 나를 찾는다면

마중하러 먼 길을 아니 가오리까?

만나거든 다시는 떠나지 않도록

사랑이여 나더러 오라 하소서.

발벗은 채로 뛰어 가오리다.

사랑이여 나더러 빨리 오라 하소서.

모든 것 버리고 달려 가오리다.

사랑이여 나를 따라오라 하소서

땅 끝까지 가오리다.

그 명령이 그런 힘을 나에게 줍니다.

 

 

 

 

 

복사꽃 피면  / 주요한 (朱耀翰)

 


복사꽃이 피면

가슴 아프다

속생각 너무나

한 없으므로.

 

 

 

 

봄달 잡이 / 주요한 (朱耀翰) 

 


봄날에 달을 잡으러

푸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

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

달은 물을 건너 가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

금물결 해치고 저어갔더니

돌 씻는 물소리만 적적하고

달은 들 너머 재 너머 기울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

‘밤’을 기어 하늘에 올랐더니

반쯤만 얼굴을 내다보면서

“꿈이 아니었더면 어떻게 왔으랴.”

 


봄날에 달을 잡으러

꿈길을 헤여 찾아갔더니

자기도 전에 별들이 막아서서

“꿈이 아니었더면 어떻게 왔으랴.”

 

 

 

 

부끄러움 / 주요한 (朱耀翰)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따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습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임이

지름길에 나왔습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습네

 

 

 

 

빗소리 / 주요한 (朱耀翰)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빛깔 없고 말없는 / 주요한 (朱耀翰) 

 


빛은 낡아 없어지나니

향기도 스러지나니

꽃은 떨어지고 먼지앉아

설움만 더하나니

눈물은 바람에 마르고

목소리도 설워가나니

떠날 때 보낸 ‘베에제’도

기억조차 스러지나니

님이여 눈물도 꽃도

기억도 믿지 못할러라

세월을 따라 새롭는 것은

오직 빛깔없고 말없는

‘마음’이러라 

 

 

 

 

 

삶·죽음 / 주요한 (朱耀翰) 

 


‘삶’은 지는 해, 피의 바다,

강하고 요란한 하늘이여.

‘죽음’은 새벽, 흰 안개

깨끗한 호흡, 소복한 색채.

 


‘삶’은 펄럭이는 촛불,

‘죽음’은 빛나는 금강석,

‘삶’은 설움의 희극,

‘죽음’은 아름다운 비극,

 


끓는 물결 산을 삼키려 할 때

돛대에 부는 바람의 통곡--

소리 없이 부어 쌓이는 밤 눈에

가득한 웃음에 던지는 가벼운 달빛--

 


‘삶’은 ‘죽음’에 이르는 비탈길,

‘죽음’은 새로운 ‘삶’의 새벽,

아, 미묘히 섞어 짜는 ‘죽음’의 실로,

무거운 ‘삶’의 폭우에 성결한 광택을 이루리로다.

 

 

 

 

 

새벽꿈 / 주요한 (朱耀翰) 

 


나는 깨었다, 졸음은 흙속에 스러지고

해는 없으되 낮같이 밝은 언덕가으로

나는 가비엽게 걸어간다, 흰 수풀

흰 나무 있는 데 길은 끊어지고

두터운 구름 그 끝에 일어난다

넓으나 넓은 언덕 우에 무거운 마음은

바깥 찬기운과 슬치는 듯하여 더욱 무겁고

허둥거리는 발은 허공을 차고 땅에 엎드리니

어디선가 이상한 앓는 소리 귀를 친다.

아아 이 언덕 저편 끝에 한 마리 누런 개 사슬에 끌려

힘없는 저항 갑령속으로 털 뽑힌 모가지,

길게 느리우고 상한 발톱은 흙을 깬다.

아아 나의 눈은 어둡고 어깨는 떨려

더운 눈물은 가슴에서 끓어오르며

밟고 섰는 땅은 흔들리고 기울어, 갑자기!

가슴식는 두려움이 내 몸을 한없는 땅 밑으로 떨어뜨린다.

아아 나는 새벽에 잠깨었으나

나의 마음은 한때도 가라앉지 않지

막을 수 없는 어떤 사슬 쉴새없이

나의 가슴을 이끄는 듯하여

낮은 베게 우에 뜻없는 눈물 쏟고 있도다,

아침 햇빛, 나의 속 어두운 담벽에 비치는 날까지.

 

 

 

 

 

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朱耀翰)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아기의 꿈 / 주요한 (朱耀翰) 

 


벌써 어디서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별이 아직 하나밖에 아니 뵈는데,

달빛에 노니는 강물에 목욕하러

색시들이 강으로 간다.

 


바람이 간다, 아기의 졸리는 머릿속으로,

수수밭에 속삭이는 소리를

아기는 알아 듣고 웃는다.

 


아기는 곡조 모를 노래로 대답한다.

어머님이 아기 잠을 재우려 할 적에.

 


어머님이 사랑하는 아기는

이제 곧 잠들겠읍니다.

 


잠들어서 이불에 가만히 누인 뒤에,

몰래 일어나 아기는 나가겠읍니다.

나가서 저기 꿈 같은 흰 들길에서

그이를 만나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읍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아기가 잘도 잔다 하시고,

다름질한 옷을 풀밭에 널러

아기의 웃는 얼굴에 입맞추고 나가시겠지요.

그럴 적에 아기는 앞강을 날아 건너,

그이 계신 곳에 가 보겠읍니다.

가서 그이에게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읍니다.

 

 

 

전원송(田園訟) / 주요한 (朱耀翰) 

 


전원으로 오게, 전원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 오나니

익은 열매와 붉은 잎사귀

가을 풍성은 지금이 한창일세.

 


아아 도회의 핏줄 선 눈을 호흡과

아우성치는 고독의 거리를 버리고

푸른 봉우리 솟아오른 전원으로 오게.

 


달이 도회의 핏줄 선 눈을 버리고

수그러진 어깨와 가쁜 호흡과

아우성치는 고독의 거리를 버리고

푸른 봉우리 솟아오른 전원으로 오게 오게.

 


달이 서러운 밭도랑을 희게 비치고

얼어 붙은 강물과 다리와 어선 위에

눈은 내려서 녹고 또 꽃 필 적이

우리들이 깊이 또 고요히 묵상할 때일세.

 


전원으로 오게, 건강의 전원으로.

인공과 암흑과 시기와 잔혹의 도회

잠잔 줄 모르는 도회 달과 별을 향하여

어리석은 반항을 하는 도회를 떠나.

 


노래는 들에 가득히 산에 울려 나오고

향기와 빛깔은 산에서 들로 울려 퍼져 간다.

아름다운 봄! 양지에 보드랍게 풀린

흙덩이를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봄.

 


그러나, 보라 도회는 피 빠는 박쥐가 깃들인 곳

흉한 강철의 신 아퓨에 사람 사람이

피와 살과 자녀에게 비쳐야 하는

도회는 문명의 막다른 골 무덤.

 


전원으로! 여기 끊임없는 샘물이 솟네.

여기 영원한 새로움이 흘러나네.

더운 태양과 건강한 대지의

자라나는 여름의 전원으로!

 


아아 그 때 새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가

봉우리와 골짜기를 크게 물리더니

반역자가 인류의 유업을 차지하리니

위대한 리듬의 전원으로 오게 오게.

 

 

 

 

황혼의 노래  / 주요한 (朱耀翰)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수수밭 사이에 뚫린 길로

오고가는 손님의 흰옷이

언덕에서 그림같이 보일 적에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나가겠습니다

그이가 참으로 오실 때는

황혼이 아기의 눈을 가리워서

색색의 오석을 다 가져간 뒤에야

그이의 참모습을 잘 볼 수 있어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황혼에 나가겠습니다

저 언덕에서 기다리노라면

먼저 나의 모양을 알아보실 터이지요

그리고 아기는 혼자서 노래부르면

그이는 그 노랫소리를 잘 아실 터이지요

어머님이 허락하시면

아기는 그이를 맞으러 황혼에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