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똥막사리 2
제민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
김종호 시인·전 애월문학회장·논설위원
시골에 산다는 건, 그것도 마을에서 떨어진 전원이라면 한 번 살아볼 만하다. 비록 출·퇴근 하듯이 대략 열 시간 정도 머물다오는 곳이긴 하지만 자연이 주는 한적함은 평화롭고 느긋하다. 하는 일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고작이지만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일이다. 인생 말년에 스스로 구속할 일이 무엇인가
요즘 나는 재미 하나를 건지고 있다. 그것은 닭 몇 마리를 키우는 일이다. 4월 중순 쯤에 제자가 토종병아리라며 11마리를 가져왔다. 마침 15평쯤 되는 빈터에 부랴부랴 그물을 두르고 닭장도 만들었다. 처음엔 괜한 일을 한다 싶었지만, 나는 요즘 병아리들이 뿅뿅 대는 모습을 보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노는 것들이 하도 귀여워서 양손 안에 가만히 보듬어주면 스르르 눈을 감고 비비비비 옹알이 한다. 어미 품도 모르고 기계에서 태어난 것들이 가엽다. 그러다보니 이것들이 무릎에도 오르고 어깨에도 오른다. '귀엽다, 귀엽다하면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듯이 이것들이 딱 그 짝이다.
기왕지사 오일장에서 육계 다섯 마리를 더 사다 놓았다. 토종닭과 육계는 동서양의 차이나처럼 몸매나 성질도 많이 다르다. 토종은 비둘기처럼 날렵하게 생긴데다 하루 종일 빨빨대며, 구석구석 파헤치며 풀씨나 벌레를 찾는다. 사람도 저렇게 부지런을 떨면 못 살리 없을 것, 더구나 살이 찔레야 찔 겨를이 없을 것이다. 물론 육계도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긴 하지만 사료를 잔뜩 먹고는 나무그늘에 누워있기를 더 좋아한다. 자다 깨면 다시 사료를 찾는다. 한마디로 먹보다. 처음에는 토종닭의 반만큼 하던 것들이 한 달여를 지나는 사이에 토종닭보다 배 이상 크고 무겁다. 둔하게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손녀가 걱정이다. 지금 중1인데 좋게 말해서 봐줄 만하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전화해서 "운동 좀 시켜라. 과외 좀 시키지 마라"해도, 에미는 걱정이 되는지 시간을 쪼개면서 학원엘 보내는 것 같다.
어느 날 닭장에 사단이 났다. 이웃 과수원 개가 침입해 일곱 마리나 물어 죽인 것이다. 놀란 닭들은 나무에도 오르고 닭장 지붕에 올라 소리치고 있었다. 처참했다. 한 마리 반을 먹어치웠다. 죽은 닭들을 묻어주는 데 한 녀석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날개 밑에 송곳니 자국이 두 개나 있었다. 차마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묻을 수 없어 나무 그늘에 편안히 뉘였더니 이 녀석이 일어나 걷는 것이 아닌가. 아, 나는 그만 눈물이 날 뻔했다. 부랴부랴 약을 바르고 마이신을 물에 타 먹였다. 그렇게 3일을 공들였더니 제법 먹이도 잘 먹고 빨빨거린다. 하지만 그만 성장이 멈춰버린 장애 닭이 되었다. 나는 이 불쌍한 것을 병순이라 이름 지어주고 자연사할 때까지 키우리라 맘먹었다.
닭의 사회에도 위계질서는 정연하다. 토종닭 병순이는 제일 작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런지는 몰라도, 후배들에겐 가혹하리만치 티를 내었다. 먹이를 줄 때도 후배들은 병순이 곁에 얼씬도 못하는가 하면 수시로 쪼아대며 자기위치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거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에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다. 6·25의 영향으로 중·고등학교에도 연대, 대대, 중대 등 군대식 편제로 학생을 조직했다. 그러니 선배는 하늘이었다. 그런 중에도 유독 후배들에게 가혹한 선배가 있었는데, 그를 만나는 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다. 어쩌다 만나게 되면 골목에 불려다가 열차를 시키고 조인트를 까였다. 그런데 그 선배는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힘도 약하고 몰명진 친구였다는 거다. 그러나 늘 힘센 친구에게 빵을 사면서 후배들에겐 악명을 떨쳤다. 언제나 돌격부대는 졸병인 것처럼 몸통은 가려져 있고,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며 설치다가 당하는 건 늘 깃털이다.
병순이는 그 후 한 달 반을 살고는 죽었다. 나는 병순이를 묻어주면서 "병순아, 너는 열심히 살았다.
이제는 개들이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거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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