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柳致環)
유치환(柳致環, 1908.7.14 - 1967.2.13)
1908년 경남 통영 출생. 호는 청마(靑馬). 유치진의 동생이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 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 《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깃발
유치환(柳致環)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노스탤지어 : 명사]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바위
유치환(柳致環)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愛隣)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유치환(柳致環)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白骨)을 쪼이리라
행복(幸福)
유치환(柳致環)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허무의 극복이라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일반적인 청마시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보면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센티멘탈리즘에 휩싸인 사춘기적 연정을 노래한 듯한 이 시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지극히 순결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현실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자기 중심적 사고에 의해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를 원하거나,
먼저 사랑하기를 꺼리는 그릇된 풍조에 참사랑의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울릉도
유치환(柳致環)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청마의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어떤 사상성이나 인생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울릉도라는 하나의 섬을 통하여 국토와 조국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민족 공동체를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서의 시인은 국토의 일부분인 울릉도에 감정이입하여,
섬의 외로움과 본토(本土)에 대한 그리움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다.
저녁놀
유치환(柳致環)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생명과 고독, 허무 등의 문제를 많이 다룬 탓에 '의지의 시인' 또는 '비정(非情)의 시인'이라 불리는 유치환의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시는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담담한 어조로 1950년대 헐벗은 우리 농촌의 저녁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엔 고통스런 농민들을 따뜻이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이 듬뿍 배어 있다.
아울러 농촌의 궁핍화 원인이 농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라는 외부 조건에 있다는 정확한 진단은 그의 투철한 현실 인식을 잘 알게 해 준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柳致環)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통해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 독재 정권 말기에 씌어진 작품으로,
청마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함께
시인에게 부여된 대역사적, 대사회적 책무를 제시하고 있다.
3․15 부정 선거란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집권 연장을 위하여 경찰과 공무원,
심지어는 조직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결국 4․19 혁명을 유발했던 우리 선거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부정이 자행된 선거였다.
이와 같은 자유당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청마의 시는 그간의 사유와 관념을 버리고 현실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바로 이 작품의 저항적 색채와 자기 다짐의 강건한 어조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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