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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와 수필隨筆

◈ - 책임을 다 한다는 것 (수필)

by 준원 김재훈 2010. 1. 20.

 

 

 

 

 


 

 

 

 

책임을 다 한다는 것

 

 

■ 책임을 다 한다는 것 - 2010년 1월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수상작 ■

 

 

 노래연습장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데 덩달아 휴대폰까지 열심히 울린다.

오름산악동호회의 회장의 전화다.

내용인즉 이번 일요일 산행은 나의 인솔 하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회장은 조상묘의 벌초와 묘제 때문에 부득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나의 뇌리는 복잡하게 꿈틀거렸다.

나 또한 같은 이유로 이번 산행을 쉴까 했는데 어쩌나 하여서이다.

그러면서 오름산악동호회의 운영위원이란 무게가 어깨를 눌러오자 그만 회장의 부탁을 허락하고 말았다.

 

 제주에는 육지와는 다르게 음력 8월 초가 되면 추석 절 이전에 일제히 조상 묘에 벌초를 하고 묘제를 지낸다.

그래서 음력 8월 1일이 되면 제주도의 온 산야에는 전쟁처럼 예초기의 굉음이 하루 종일 윙윙거린다.

그렇게 조상 묘를 깨끗이 벌초하고 나서 팔월보름 명절날에는 온 친족들이 모여서

가정마다 돌아다니며 차례를 지내고 오랜만에 만난 해후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상묘의 벌초와 묘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이번 일요일(9월13일)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을 했으나 아내와 의논한 끝에 저녁에 어머니를 모시고 생신을 축하해 드리기로 하고,

문중묘제에는 친족들에게 미안하여도 잘 말씀드려서 불참하기로 하였다.    

 

  나에게 33년이란 공직은 마라톤처럼 멀고도 험한 코스였지만 인내와 성실로 달려온 보람찬 생이었다.

하지만 정작 정년퇴임을 하고 나자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고 섭섭하였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는 ‘아, 이제는 갈 곳이 없구나!’ 했을 때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생의 허무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마누라의 속 깊은 뜻을 따라 노래연습장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박쥐처럼 밤에 일하고 낮에 잠을 자는 거꾸로 된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걱정은 몸이 점점 불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오름산악회 K회장 일행이 노래연습장에 왔다가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산에도 오르고,  운동도 하고, 젊은이와 어울리기도 해야 한다며

산행의 중요성에 열을 올리는 K회장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평소에 나 또한 건강을 위해서 뭔가를 하기는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여 오던 차였다.

특히 회장과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점도 동호회의 가입에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심중에는 어떤 친목회나 단체모임을 갈망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마누라의 동호회 가입 종용도 크게 작용을 했다 싶다. 어쨌거나 나는 오름산악동호회에 가입하여 열성분자가 되었고

백여 명 회원을 거느린 오름산악동호회의 운영위원이란 중책(?)을 맡다보니 회장의 부탁을 쫓기는 듯 승낙하고 말았다. 

 

 회장은 이번 9월 13일 정기산행에는 한라산 윗세오름을 오르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의 오름 경험이 부족한 점을 고려해서 쉬운 코스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직장에 몸담았을 때는 오름 탐사반에서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산행에 참가한 경험도 있다.

더구나 얼마 전에 산행하였던 윗세오름은 아니다 싶어서

아무래도 이번 산행은 월랑봉(다랑쉬오름)코스가 좋겠다는 생각을 회장에게 말하고 목적지를 변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목적지를 막상 정하고 보니 걱정이 앞선다.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으로 가는 길목은 물론,

오름 분화구 둘레에도 그늘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민둥산 이라는 점이다.

9월 중순이라 해도 여름의 끝물더위는 만만치 않아서 회원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나 어쩌랴!  이미 카페 공지사항에 다 게재를 했고, 많은 회원들이 참여 여부를 댓글로 올린 후라서.....

 

  간밤에는 한 2시간이나 잤을까? 소풍을 앞두고 잠을 못 이뤄 뒤척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밤3시경에 노래연습장 문을 닫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하다보면 새벽4시경에야 잠자리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08시 전에 회원보다 먼저 모임장소에 가서 확인하고 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책임자란 이래저래 큰 짐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힘들고 피곤하다.

서둘러 모임장소인 문예회관 주차장으로 가는데 앞서가는 차량이 눈에 익은 회장 차다.

내 속으로는 벌초(성묘) 가기 전에 집결지에 들려서 상황을 살피고 가려나 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회장은 성묘를 다음 일요일로 미루고 산행에 동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나 보았다.

정작 동참은 하더라도 일반 회원으로 뒤에 따라 다니기만 한다 했지만 나에겐 버팀목처럼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나로 하여금 산행에 익숙하게 하고, 많은 오름을 알게 하려는 속 깊은 뜻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기다보니 어젯밤 밤샌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참가한 회원들을 남녀 구분하여 인원을 파악하고, 차량지원 문제,

그리고 안전운행 당부, 몇몇 임원진의 불참경위를 간략히 설명하고,

참가한 회원들의 소개와 가벼운 운동으로 마무리하여 드디어 계획대로 출발을 하였다.

  

  참으로 산행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오히려 좋았다.

그늘 없는 코스라서 더욱 그러 했는지도 모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을의 문턱에서 군데군데 피어있는 억새들이 우리에게 하얀 손을 흔들어댄다. 

가슴을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하였더니 온 하늘과 가을의 경치가 내 안으로 다 들어온다.

호텔에 근무하는 송 과장을 선두로 울긋불긋한 행렬이 마치 장사(長蛇)의 미끄러짐 같이 유연하다.

뒤에서 올라오는 헉 헉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문득 이제는 퇴출하여 없어진 검은 연기를 날리던 기관차를 연상하게 한다.

무엇이 이들을 환호하게 하는가, 회원들은 연방 “야호!”를 연호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경 아닌 곳이 없다.

거대한 한라산은 어머니, 올망졸망한 오름들을 자식처럼 품고 있고,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멀리 일출봉과 우도가 어우러져 한 폭의 상큼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올라가다 힘이 들면 쉬고, 뒤돌아보면 오름 밑으로 펼쳐진 조망이 장관이다.

 

 바람이 시원한 오름 정상에서  나름대로 정성껏 싸고 온 간식 파티!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모르리라.

일상에서의 해방감과 근심 걱정을 벗어놓은 자유를 만끽하며 이마에 송송 돋아난 땀을 훔치면서 먹는 맛이란!!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어릴 적에 즐겨 부르던 동요의 한 구절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은

아마도 지난여름의 무더위가 무척이나 더웠던 모양이다.

현직 초등 여교사인 김 선생이 아름다운 경치에 어쩔 줄을 모르고 사뭇 환호한다.

어쩌면 이 한 시간을 위하여 일주일 내내 견디었나보다.

  다랑쉬오름을 내려와 길을 건너면 바로 아끈다랑쉬오름의 기슭이다.

아끈다랑쉬오름 굼부리가 여느 넓은 공연장을 연상하게 한다.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띠와 억새의 물결, 나는 조각배를 타고 파도 위에 출렁이는 것일까?

여기서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가없이 하얗게 출렁이는 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것일까,

한 여성회원이 그만 납작하게 엎으러 진다. 다행히 풀밭이 스펀지 역할을 해서인지 다친대가 하나도 없다.

그제야 회원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넘어지는 것도 전염이 되는지 이번에는 자영업을 하는 꽃집 아줌마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건강한 웃음들이 억새들의 환호처럼 가을 들판에 왁자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 우리 또한 수 없이 오른 곳,

하지만 올 때 마다 계절의 풍광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고, 자

연과 하나가 되는 우리 마음 또한 그 때마다 새로워진다.

 다랑쉬오름이여! 아끈다랑쉬오름이여!

 아쉬움을 두고 떠나지만, 어깨의 무거운 책임도 이곳에 부려놓고 떠나지만,

신이 내려주신 유산으로 굳게 버티어 서서 자손만대에 영원 하라!

그리고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순리로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가르치고 참된 사랑을 배우고 깨닫게 하라.

 오름을 뒤로하고 다섯 대의 차량이 신나게 질주한다.

앞서가는 일행의 차량에서 한 여성회원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하얀 수건을 흔드는 모습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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