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 김종호 (金宗昊)
김종호 시집 ‘순례자’를 보내왔다.
‘율려(律呂)의 곡조를 타는 잠연한 순례의 길’이란
아주대 강사이자 시인인 김광기 씨의 해설처럼
‘시인은 율려 속에서 나무가 되어 숨을 쉬기도 하고
귀를 열어두고 가끔은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며,
고독한 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순동 김종호(巡東 金宗昊) 시인은
1939년 제주도 애월에서 태어나
중등 미술교사 명퇴
문예사조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제주문인협회,
공무원문인협회, 크리스천문인협회 회원,
애월문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시집으로 ‘뻐꾸기 울고 있다’
‘설산에 오르니’ 등이 있다.
시집 ‘순례자’에서 시 몇 편을 골라
화살나무 고운 단풍과 함께 올린다.
서시 / 빛 한 줄기
길에서 눈을 뜨고
그리움은 끝없이
어느 별에서 불어오는가
아무 것도 아닌
날마다 빈 하늘에
무엇일까
사무치도록 막막한
어둠 속에 손짓하는
붉은 사막 너머로
끌고 가는 인력, 한 줄기
폐허 같은 모래바람에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뀔 때
우주 어느 끝에서
몇 백 광년을 흘러온
내 영혼에 꽂히는 작은 광원,
믿음이 바라보는
빛, 한 줄기
낙타처럼 길가의 마른 잎이나 뜯으며
빈 속내로 터벅터벅 가는 길에
순례자
해보다 먼저
고내오름 정상에 오르면
애드벌룬처럼
벌건 해가 솟아오를 때
뭉클, 심장이 멈추고
온 산이 출렁거린다
저 빛을 위하여
나의 시는 순례자
길은 멀어
터벅터벅 걸어간다
수평선 1
길을 몰라
사람들이 길을 잃을 때
수평선을 그려 놓았나
저 푸르고 엄연한 선
바다를 사는 것과
수평선을 건너는 것은 무엇인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시원
수평선
독 하나 빚고 싶네
별빛 내리는 강기슭
오래 곰삭은 흙으로
허물없이 쓰다 말
독 하나 빚고 싶네
청자 아니면 어떠랴
백자 아닌들 어쩌랴
하늘빛 옥색으로 설레지 않겠네
그리 높이 앉아서 고독하지 않겠네
종일 구시렁거리는 마누라
눈물 몇 방울 버무려서
김치도, 된장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가끔은 텁텁한 농주도 담가서
시답지 않은 세상 거나해서
콧등 시큰하게 한 자락 부르겠네
무정한 마누라 손때 묻어 정분나고
젖은 눈빛 배어 살가운 독
시름 다독이며 살다보면
꿈같은 한 세상 꿈만 같겠네
가을 편지 1
그 봄에
밤을 밝히면서 편지를 썼네
심장이 쿵쿵 뛰는 편지를 썼네
빨간 우체통 앞에서 나의 망설임은
담 너머로 몰래 홍시를 따려는 떨림이었네
얼른 편지를 넣고 돌아설 때
시험 잘 치고 바라보는 하늘 같았네
이 가을에 편지가 오네
주소를 못 찾아 떠돌다가
어느 하늘을 떠돌다가 돌아와
가을 숲에 내리는 단풍잎
더욱 가슴 붉은 노래를 부르네
오랜 순력에서 돌아와
이제야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있네
새소리 1
나무의 우듬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햇빛을 굴리는 소리
바람을 굴리는 소리
묵시의 숲에는
새소리뿐
아예 나는 너의 귀
네가 숲인 것처럼
나는 나무로 섰다
아득하고 아득하여라
처음의 노래여!
밤마다 별빛으로 씻어내어
환한 물빛 맑은 소리여!
나는 귀먹고 눈멀어서
천지에 새소리로 캄캄하다
하현달
이월 스무하루 아침
중천에 보리빵 반쪽이
구름에 앉아 울고 있습니다
장기라도 떼어 팔고
길에 나앉은 노숙자인지
하늘 벌레들이 울다가
다 울지 못한 배고픔인지
그도 아니면
가난한 우리 누이
골목어귀에 몰래 숨어서
한쪽 눈으로만 하는 사랑인지
길가에 반쪽으로 앉아
머뭇대는 사정은 무엇인지
오늘 아침
내 속을 열어보라고
자꾸만 재촉을 합니다
일몰을 마시다
방파제에 올라
술 한 잔 앞에 놓고 저물어간다
하루를 다한
일몰은 아름답다
파도는 자꾸 달려와
속절없이 부서지고
먼 바다 먼 날
하나 둘 불을 켤 때
분장실에 불이 꺼지고
늙은 배우의 쓸쓸한 실루엣
일몰의 여명을
꿀꺽 목으로 넘긴다
술 한 잔 앞에 놓고
저물어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사진 / 시인 김창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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